최영 시인의 군산풍물기(70)
2010.01.31 13:14
최영 시인의 군산풍물기(群山風物記) (70)
라이 따이한
1968.11.10 가수 차중락이 서울 동일극장에서 공연도중 쓰러졌습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립구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차중락이 낙엽이 지는 계절에 떠나갔습니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습니다. 차중락의 사인은 급성뇌막염으로 발표했고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습니다. 이러한 고국의 뉴스는 파월장병에게도 많은 아쉬움과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얼마전 위문공연을 다녀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원인이 월남에서 걸린 성병이란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채명신 장군이 가장 골치 아파했던 그 일이 번졌습니다. 사령부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군의관은 차중락의 예를 들어 성병예방 특별교육을 시켰고 중대장 김상규 대위는 한국산 콘돔을 중대원 모두에게 5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공휴일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고래로 전쟁이 있는 곳에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필요악인지 모릅니다. 월남말로 붕(붐)이 배腹입니다. 붕붕센터라 하면 여자 성을 파는 집을 말합니다.
우리 부대 앞에도 3채의 붕붕센터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갔던 위병소 정 병장, 여인이 마우마우(빨리빨리) 했다고 말하자, 그 반대말은 짬짬(천천히)이라고 월교대 출신 선배가 알려주었습니다. 다음에도 그 여자를 만났는데 마우마우 하기에 그가 짬짬했더니 여자가 웃더라고 자랑한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맹호사령부 정문 조금 지나, 19번 도로를 타고 오며는 한국군 보병이 지키는 교량 옆, 빈케읍을 지나 1대대 앞에도 붕붕센터가 있었습니다. 한 때 군산의 미군부대 주변의 풍속도가 주월 한국군 부대 주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큐논항에는 한진상사가 있었습니다. 한진상사의 수십 대 수송차량이 우리 부대 앞 19번 도로로 군수품을 싣고 안케 미군부대를 향해 줄지어 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맨 앞과 뒤 차량에는 중무장한 사원들이 사주경계를 하고 가는 모습을 보면 예의 한국군과 다름없었습니다. 큐논에는 한진을 비롯한 많은 민간인들이 들어와 있었고 술과 여자의 단골집들도 있었습니다. 보직이 좋은 장교들은 단골로 여자를 만나다가 귀국 때가 되면 후임장교에게 인계하고 가는 전통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파월기술자나 회사에 다닌 사람들 중 일부는 현지처를 두거나 계약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혼자 생활하는 것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예이지만 기갑연대 보안대 지길수 하사는 빈케 군청을 출입했습니다. 그는 월남 말을 월남사람보다 더 잘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연대장과 군수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지역 유지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전역하여 그곳 명문가의 딸과 정식결혼하여 미군부대 내의 회사에 다녔습니다. 내가 군청 뒤 그의 집에 갔었는데 부인이 한국어판 삼국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임신 중인 그녀는 참 품위있고 정확한 서울 말씨를 구사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어느 병사의 귀국을 환송하기 위해 그의 애인이 큐논항에 나왔습니다. 그녀는 병사에게 뱃속에 아이를 위해서 꼭 다시 돌아오라고 월남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말로 “웃기네!” 했고, 월남여인은 그러겠다고 말한 줄 알고 고마운 눈물을 흘리며 작별했다는 농담이 퍼졌습니다. 이게 뒷날 라이 따이한 (來, 大韓)입니다.
1973. 4. 26일 주월한국군이 완전 철수했습니다. 월남 참전 8년 반 동안 5,099명이 전사하고 320,418명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중 일반병사가 월남에 씨앗을 뿌리고 온 경우는 극히 적습니다. 월남에서 현지 전역했거나 파월기술자 등 민간인 신분으로 있다가 부득이 놓고 온 자식들이 뒷날 많은 애달픔과 비극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우리 정부는 라이 따이한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75. 4. 30일 월남이 패망했습니다. 그 얼마 전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하늘을 통해 월남을 탈출하기 위해 사이공으로 모였습니다. 그 가운데 안케에서 철물공장을 했던 지길수 씨가 사이공에 와서 국외 탈출을 시도하는 현지 르포기사를 중앙 일간지와 방송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길수 씨는 올해 67세이고 그의 아이들은 40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와 그의 아름다운 처 그리고 자식들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 (2010.1.29.)
라이 따이한
1968.11.10 가수 차중락이 서울 동일극장에서 공연도중 쓰러졌습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립구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차중락이 낙엽이 지는 계절에 떠나갔습니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습니다. 차중락의 사인은 급성뇌막염으로 발표했고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습니다. 이러한 고국의 뉴스는 파월장병에게도 많은 아쉬움과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얼마전 위문공연을 다녀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원인이 월남에서 걸린 성병이란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채명신 장군이 가장 골치 아파했던 그 일이 번졌습니다. 사령부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군의관은 차중락의 예를 들어 성병예방 특별교육을 시켰고 중대장 김상규 대위는 한국산 콘돔을 중대원 모두에게 5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공휴일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고래로 전쟁이 있는 곳에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필요악인지 모릅니다. 월남말로 붕(붐)이 배腹입니다. 붕붕센터라 하면 여자 성을 파는 집을 말합니다.
우리 부대 앞에도 3채의 붕붕센터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갔던 위병소 정 병장, 여인이 마우마우(빨리빨리) 했다고 말하자, 그 반대말은 짬짬(천천히)이라고 월교대 출신 선배가 알려주었습니다. 다음에도 그 여자를 만났는데 마우마우 하기에 그가 짬짬했더니 여자가 웃더라고 자랑한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맹호사령부 정문 조금 지나, 19번 도로를 타고 오며는 한국군 보병이 지키는 교량 옆, 빈케읍을 지나 1대대 앞에도 붕붕센터가 있었습니다. 한 때 군산의 미군부대 주변의 풍속도가 주월 한국군 부대 주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큐논항에는 한진상사가 있었습니다. 한진상사의 수십 대 수송차량이 우리 부대 앞 19번 도로로 군수품을 싣고 안케 미군부대를 향해 줄지어 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맨 앞과 뒤 차량에는 중무장한 사원들이 사주경계를 하고 가는 모습을 보면 예의 한국군과 다름없었습니다. 큐논에는 한진을 비롯한 많은 민간인들이 들어와 있었고 술과 여자의 단골집들도 있었습니다. 보직이 좋은 장교들은 단골로 여자를 만나다가 귀국 때가 되면 후임장교에게 인계하고 가는 전통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파월기술자나 회사에 다닌 사람들 중 일부는 현지처를 두거나 계약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혼자 생활하는 것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예이지만 기갑연대 보안대 지길수 하사는 빈케 군청을 출입했습니다. 그는 월남 말을 월남사람보다 더 잘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연대장과 군수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지역 유지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전역하여 그곳 명문가의 딸과 정식결혼하여 미군부대 내의 회사에 다녔습니다. 내가 군청 뒤 그의 집에 갔었는데 부인이 한국어판 삼국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임신 중인 그녀는 참 품위있고 정확한 서울 말씨를 구사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어느 병사의 귀국을 환송하기 위해 그의 애인이 큐논항에 나왔습니다. 그녀는 병사에게 뱃속에 아이를 위해서 꼭 다시 돌아오라고 월남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말로 “웃기네!” 했고, 월남여인은 그러겠다고 말한 줄 알고 고마운 눈물을 흘리며 작별했다는 농담이 퍼졌습니다. 이게 뒷날 라이 따이한 (來, 大韓)입니다.
1973. 4. 26일 주월한국군이 완전 철수했습니다. 월남 참전 8년 반 동안 5,099명이 전사하고 320,418명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중 일반병사가 월남에 씨앗을 뿌리고 온 경우는 극히 적습니다. 월남에서 현지 전역했거나 파월기술자 등 민간인 신분으로 있다가 부득이 놓고 온 자식들이 뒷날 많은 애달픔과 비극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우리 정부는 라이 따이한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75. 4. 30일 월남이 패망했습니다. 그 얼마 전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하늘을 통해 월남을 탈출하기 위해 사이공으로 모였습니다. 그 가운데 안케에서 철물공장을 했던 지길수 씨가 사이공에 와서 국외 탈출을 시도하는 현지 르포기사를 중앙 일간지와 방송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길수 씨는 올해 67세이고 그의 아이들은 40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와 그의 아름다운 처 그리고 자식들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 (201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