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선문/임두환
2010.02.02 18:44
마지막 선물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임 두 환
누구나 마지막 가는 길은 고귀하다. 우리들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큰 어른이셨던 김수환 추기경이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셨다. 그는 현대사의 질곡(桎梏)속에서도 스스로를 낮추며 이웃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국민들과 같은 길을 걸으셨던 분이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안구(眼球)를 기증하는 등 나눔과 사랑의 정신을 아름답게 실천하셨다.
이승을 마감하면 저승으로 간다는데 과연 영혼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나는 가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는 토속신앙에다 불교와 유교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러던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큰아들 재영이 때문이었다. 재영이는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집에서 쉬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때 나이 스무 살이었다. 재영이가 숨을 거두던 날, 전주반석침례교회 이희환 목사님께서는 재영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를 해 주셨고, 장례도 주관해주셨다. 화장(火葬)을 해서 어느 강물에 뿌렸다는데 나는 지금도 그 곳을 모른다. 1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큰아들 재영이는 내 가슴에 남아있다. 꿈에서라도 한 번 보고 싶지만, 너무도 멀리 가버렸는지 아직껏 소식이 없다.
아내와 나는 거의 날마다 전주 아중천변에서 산책을 한다. 가끔, 나 혼자일 때면 인후공원이나 기린봉을 오르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아내의 말동무라도 할 겸 아내의 파트너를 자처하고 있다. 아중천변에는 전주시가 물길 따라 아름답게 산책로를 꾸며 놓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인후 휴먼시아아파트에서 아중천변을 한 바퀴 돌아오면 2시간쯤 걸리는데 약 1만보가 나온다. 하루에 1만보를 걷게 되면 건강에 좋다고 하던데, 걷는 것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으리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행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壽과 사람 역할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五福)의 첫째와 마지막으로 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9988234가 유행어처럼 퍼지고 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고생하고 자식들 얼굴이나 보고서 눈을 감는 것이, 죽음 복을 잘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던가.
나는 나이가 들면서부터 장묘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천당이나 지옥을 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죽으면 시신을 매장(埋葬)할 것인가, 화장(火葬)할 것인가? 화장을 한다면 납골당일까, 수목장일까를 놓고 고민해왔다.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양지바르고 멋진 산 중턱에는 으레 죽은 자들의 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조상 묘를 잘 써야 후손이 번창한다는 풍수지리설도 이제는 힘을 잃었는지, 허름하게 보이는 묘지들이 볼썽사납기 만하다. 내가 조양임씨(兆陽林氏) 진안(鎭安)지역 총무를 맡아 일한지 올해로 10년째가 된다. 해마다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면 종친어른들의 화두(話頭)가
“늙은 우리들이 죽고 나면 누가 조상묘소를 관리할 것이며, 시제는 누가 모실는지가 걱정.”
이라고 하신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이제는 농촌에서도 굽은 소나무를 찾아볼 수 없으니 걱정이 태산이다. 기우(杞憂)라고 여긴다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다. 이제야 종친들도 큰일이라 싶었는지, 가끔 납골당 이야기를 끄집어내곤 한다. 토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매장(埋葬)문화는 오히려 사회문제가 아닐까? 이제는 농경시대가 아닌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이니 만큼, 장례문화도 하루빨리 변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주고 갈 선물은 없을까? 내가 죽으면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이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다가 이용 집사님을 알게 되었다. 이용 집사님은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해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뒤, 전북시신기증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이 분으로부터 ‘시신을 기증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며, 본인 역시 시신기증등록을 해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는 나도 모르게 자꾸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시신기증서약서를 써놓고도 등록을 하지 못한 채, 2개월이나 망설였다. 어려서부터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나로서는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워서였다. 하나님께 응답을 주시라고 여러 차례 기도를 드렸다. 마침내 아내와 나는 시신을 이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하였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아내와 나도 무언가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결정한 것이다.
시신기증서약서는 자필로 본인의 인적사항을 기재해야 하고, 죽은 뒤 시신을 책임질 유가족의 동의서가 필요했다. 아내와 나는 아들 진영이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는데, 영문도 모르는 아들을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시신을 기증하게 되면, 죽은 뒤 아무런 조건 없이 의학계열대학의 해부학연구를 위하여 몸을 내놓아야 한다. 해부학교육과 연구가 끝나면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추모실(납골당)에 안치시키고서, 전북대학교에서는 매년 시신기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과 함께 감사의 뜻을 전하는 추모제를 개최한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죽어서도 할 일이 있어서 기쁘다!”
하는 생각으로,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희생이 아닌 최고의 봉사라는 생각으로 2009년 12월 22일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시신상담실을 찾아가 시신기증서약서를 등록했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지만, 세상에 무엇을 선물하고 떠나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의학전문대학원 시신상담실에서 본 이 글귀를 보니 갑자기 가슴에서 뎅뎅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 2010. 1. 3. )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임 두 환
누구나 마지막 가는 길은 고귀하다. 우리들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큰 어른이셨던 김수환 추기경이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셨다. 그는 현대사의 질곡(桎梏)속에서도 스스로를 낮추며 이웃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국민들과 같은 길을 걸으셨던 분이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안구(眼球)를 기증하는 등 나눔과 사랑의 정신을 아름답게 실천하셨다.
이승을 마감하면 저승으로 간다는데 과연 영혼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나는 가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는 토속신앙에다 불교와 유교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러던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큰아들 재영이 때문이었다. 재영이는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집에서 쉬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때 나이 스무 살이었다. 재영이가 숨을 거두던 날, 전주반석침례교회 이희환 목사님께서는 재영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를 해 주셨고, 장례도 주관해주셨다. 화장(火葬)을 해서 어느 강물에 뿌렸다는데 나는 지금도 그 곳을 모른다. 1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큰아들 재영이는 내 가슴에 남아있다. 꿈에서라도 한 번 보고 싶지만, 너무도 멀리 가버렸는지 아직껏 소식이 없다.
아내와 나는 거의 날마다 전주 아중천변에서 산책을 한다. 가끔, 나 혼자일 때면 인후공원이나 기린봉을 오르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아내의 말동무라도 할 겸 아내의 파트너를 자처하고 있다. 아중천변에는 전주시가 물길 따라 아름답게 산책로를 꾸며 놓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인후 휴먼시아아파트에서 아중천변을 한 바퀴 돌아오면 2시간쯤 걸리는데 약 1만보가 나온다. 하루에 1만보를 걷게 되면 건강에 좋다고 하던데, 걷는 것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으리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행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壽과 사람 역할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五福)의 첫째와 마지막으로 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9988234가 유행어처럼 퍼지고 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고생하고 자식들 얼굴이나 보고서 눈을 감는 것이, 죽음 복을 잘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던가.
나는 나이가 들면서부터 장묘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천당이나 지옥을 가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죽으면 시신을 매장(埋葬)할 것인가, 화장(火葬)할 것인가? 화장을 한다면 납골당일까, 수목장일까를 놓고 고민해왔다.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양지바르고 멋진 산 중턱에는 으레 죽은 자들의 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조상 묘를 잘 써야 후손이 번창한다는 풍수지리설도 이제는 힘을 잃었는지, 허름하게 보이는 묘지들이 볼썽사납기 만하다. 내가 조양임씨(兆陽林氏) 진안(鎭安)지역 총무를 맡아 일한지 올해로 10년째가 된다. 해마다 정기총회가 있는 날이면 종친어른들의 화두(話頭)가
“늙은 우리들이 죽고 나면 누가 조상묘소를 관리할 것이며, 시제는 누가 모실는지가 걱정.”
이라고 하신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이제는 농촌에서도 굽은 소나무를 찾아볼 수 없으니 걱정이 태산이다. 기우(杞憂)라고 여긴다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다. 이제야 종친들도 큰일이라 싶었는지, 가끔 납골당 이야기를 끄집어내곤 한다. 토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매장(埋葬)문화는 오히려 사회문제가 아닐까? 이제는 농경시대가 아닌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이니 만큼, 장례문화도 하루빨리 변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주고 갈 선물은 없을까? 내가 죽으면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이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다가 이용 집사님을 알게 되었다. 이용 집사님은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해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뒤, 전북시신기증자협회 부회장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이 분으로부터 ‘시신을 기증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며, 본인 역시 시신기증등록을 해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는 나도 모르게 자꾸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시신기증서약서를 써놓고도 등록을 하지 못한 채, 2개월이나 망설였다. 어려서부터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나로서는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워서였다. 하나님께 응답을 주시라고 여러 차례 기도를 드렸다. 마침내 아내와 나는 시신을 이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하였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아내와 나도 무언가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결정한 것이다.
시신기증서약서는 자필로 본인의 인적사항을 기재해야 하고, 죽은 뒤 시신을 책임질 유가족의 동의서가 필요했다. 아내와 나는 아들 진영이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는데, 영문도 모르는 아들을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시신을 기증하게 되면, 죽은 뒤 아무런 조건 없이 의학계열대학의 해부학연구를 위하여 몸을 내놓아야 한다. 해부학교육과 연구가 끝나면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추모실(납골당)에 안치시키고서, 전북대학교에서는 매년 시신기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과 함께 감사의 뜻을 전하는 추모제를 개최한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죽어서도 할 일이 있어서 기쁘다!”
하는 생각으로,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희생이 아닌 최고의 봉사라는 생각으로 2009년 12월 22일 전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시신상담실을 찾아가 시신기증서약서를 등록했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지만, 세상에 무엇을 선물하고 떠나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의학전문대학원 시신상담실에서 본 이 글귀를 보니 갑자기 가슴에서 뎅뎅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 2010. 1.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