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송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2010.02.09 12:45
추모의 글,
송상옥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내가 송선생님을 처음 뵈온게 1987년 봄이었으니, 벌써 2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 해 봄에 내가 신문사에 응모한 단편이 입선됐다는 전화를 받고 찾아가 만나뵙고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로 송선생님은 내게 문단의 선배로, 문학의 길에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소설의 세계에서는 늘 스승으로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다.
송선생에게 도움을 얻고 가르침을 받은 분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그 당시 1982년 부터 이곳 엘에이 지역에 미주한국
문인협회를 설립하고 창립자로 문단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데 애를 많이 쓰셨다.
그리고 해마다 양 신문사의 문예 응모에 심사위원으로 수년간 수고하셨으니
그 등용문을 통해 나온 문인들만 해도 두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다.
송선생님께서 이곳 미주 땅에 이뤄놓은 문학의 사령탑이야 말로 실로 크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시며 정통적인 문학성을 언제나 주장하시던 선생님은
좀 편협적이다 할 만큼 성품이 강직했다. 평소에 말씀이 많지 않은 편인데다 늘 엄한
표정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어려움이 있어서 가깝게 지내는 친지분이 별로 많지
않은듯 했다.
편법을 용납하지 않는 선생님은 문학하는 일을 삶의 사치나 부리는 취미정도로
여기며 이름이나 내고 단체 활동이나 하는 태도를 무척 경시 했다. 그래서 열과
성을 다해 작업을 하지 않고 글쓰는 일에 게을리하는 문인들을 대놓고 야단을
치며 싫어하는 지라 선생님을 가까히 하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문학이라는 한 배에 탔다, 그것도 장르가 같은 소설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을 믿고 가끔 사스러운 전화도 드렸고 몇 번 점심 시간에 만나 식사도 함께
나눴던 경험이 있다. 그 때 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의식하면서 저름 만났으며
'작품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말아요. 혹시 표절이라도 당하면 어쩔려구요?'
이런 식으로 소심한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분의 성격이었는지 모르지만 문학에
있어서 표절 문제에 휩쌓였던 몇몇 문인들에 대한 바른 평가를 내기 위해
남이 짊어지기 싫어하는 거치장스러운 짐도 스스러 졌던 분이다.
송선생님의 이런 저런 노력이 그나마 이 땅에 문학을 꽃 피게 하는데 대단한
영향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유일한 문학 정통 잡지 '미주문학'을 계간으로 만든 후
수년이 흘러 그가 이뤄놓은 업적이 대단하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후배 문인 장태숙 회장에게 후임을 맡긴 후 당신의
문학 50년사를 정리한다고 외출도 삼가셨는데...
'창작 50년, 작품에 쓰지않은 이야기들' 1,2,3, 회를 집필하시고 4회는 나오지도
못 한 채.... 아마도 가슴에 품고 가는 게 더 가치있다고 여기신 모양이다.
우리 후배 문인들에게 못 다 들져준 송선생님의 말씀 무엇인지 다 알 것 같다.
요즘으로는 짧게 사시고 인생을 마감하신 선생님께서 가슴에품고 가신 못다한
애기가 뭐겠는가? 계간 '미주문학'의 밝은 내일을 위해 문인들이여 깨어있으라!
송선생님의 약간 쉰듯 하면서 사투리 섞인 그러면서도 정겨운 목소리
어느새 그립다. 부디 안식하소서.
바다로 간 술집
가파른 언덕 너무도 숨찬 길에서
쉼 없이 떠돌던 26,645일들이
이제는 겨우 종잇장 무개
술집은 온갖 잡스러움, 천박함으로 가득
공허한 소리들만 맴돌고
비틀거림과 칙칙함이 뒤섞인 속되고 속된
인간 세상의 이름, 술집을 떠난다
벗어날 길 없는 일상의 늪 속에서
매양 허우적 거리다 아픈 가슴을
술집서 달랠 수 있었거늘
혀를 톡 쏘며 목젖을 흝어내리는
소주맛, 혀에 담은 채 간다.
생명의 근원이고 내 삶의 본향인
바다로 술집을 옮긴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꿈꾸어왔던
바다, 그 위를 훨훨 날아볼까
아니, 바다의 품에 안겨 술잔을 들리
2010년 2월9일 저녁
故, 송상옥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조정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