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
2011.03.19 16:42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
김 학
만세의 달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유난히 봄을 좋아하는 여인이어서가 아니고, 때때로 병천순댓집에 들러 소주 한 잔 마실 줄 아는 그런 여인이어서도 아니다. 총각 때 헤어진 첫사랑의 여인은 더더구나 아니다.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은 언제나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댕기머리 차림으로 내 기억의 무대에 나타나곤 한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3월의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를 유관순 누나라고 불렀다.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누이동생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고, 고모도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내가 철이 들면서 그 호칭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똑같이 부르는 호칭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 그 여인을 내가 누나라고 부르면 아버지는 조카딸, 할아버지는 손녀딸이라고 해야 촌수가 맞다. 고모가 그녀를 언니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 그녀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竝川)에서 태어났다. 나이로 따지면 2011년 올해 아흔아홉 살, 나보다는 무려 서른 살이나 연상이다. 나이차가 많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나보다 촌수가 두 단계나 높으신 할아버지까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일이 아닌 듯싶다.
지난 3월 1일,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전주에서는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애국선열들의 한 맺힌 눈물일까.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던 승용차가 전라도를 벗어나 충청도에 이르자 비는 눈발로 바뀌어 흩날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먼 산마루에는 고희를 넘긴 어르신들의 머리카락처럼 희끗희끗 눈이 덮여 있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는 눈이 내리자마자 녹아버려 다행이었다.
오전 10시쯤 아우내[竝川]를 거쳐 독립기념관에 이르렀다. 10여 년 전보다 주위환경이 많이 개발되어 눈길을 끌었다. 전시장을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역사지만 다시 살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투사들의 투혼이 감동스럽고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숨져간 독립투사들의 최후를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더라면 나도 저 애국자들처럼 목숨을 버릴 각오로 독립투사가 될 수 있었을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신 독립투사들이 더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올 3월 1일은 제92주년 3‧1절. 독립기념관에는 많은 태극기들이 게양되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앞날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반가웠다. 3‧1절은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백성들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리는 날이다. 이 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218개 군 가운데서 211개 군으로 번져 나갔다고 한다.
대한독립만세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유관순 누나는 사촌언니 유예도와 더불어 그녀의 고향인 아우내장터[충남 천안시 병천(竝川)]에서 4월 1일 장날을 택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었다. 일본 헌병에게 붙잡힌 유관순 누나는 심한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날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할 때 19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니 일제가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었는지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3‧1운동 때 전국적으로 구속된 사람이 무려 4만 7백여 명이고, 목숨을 잃은 이들이 무려 7천 5백 9명이었다니 얼마나 처절한 독립투쟁이었던가?
이화학당 1학년생이던 유관순 누나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1920년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의 황족 방자(芳子)의 결혼을 축하하고자 사면감형이 되어 1921년 1월 2일이면 출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유관순 누나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꽃다운 나이 열여덟 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인가?
당시 10대 소녀였던 유관순 누나는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큰소리로 이렇게 호령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죄 없는 우리 동포를 수없이 죽였으니,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그런 너희가 어찌 재판을 하겠단 말이냐?"
우리는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 또는 소설작품에서 유관순 누나를 자주 만났었다. 그 작품 속에서 유관순 누나는 언제나 10대 소녀로 나온다. 그런데 세월이란 엘리베이터를 탄 나는 어느새 청년과 장년을 거쳐 노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소년시절에 불렀던 누나라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려니 거북스럽다. 그래서 나는 '누나'란 호칭 대신에 '열사'란 호칭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유관순 열사! 갑자기 거리가 멀어진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제야 제대로 호칭을 부르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 한 번 입에 익은 호칭을 바꾸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꾸 부르게 되면 곧 익숙해지려니 싶다.
독립투사들 중에는 의사(義士)도 있고 열사(烈士)도 있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처럼 정의를 위해 무력으로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분들은 의사라 부르고, 이준과 유관순처럼 정의를 위해 맨몸으로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분들에겐 열사란 호칭을 붙여드리는 게 옳다.
유관순 열사, 배달겨레의 후손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그렇게 불러야 하리라. 그러면 촌수가 헷갈리지도 않을 게 아닌가? 유관순 열사, 그녀는 언제나 3월이면 생각나는 겨레의 연인이다.
(2011.3.14.)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 등단/《수필아, 고맙다》등 수필집 11권, 수필평론집《수필의 맛 수필의 멋》/ 한국수필상, 펜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전라북도문화상, 목정문화상 등 다수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mail: 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http://blog.daum.net/crane43
김 학
만세의 달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유난히 봄을 좋아하는 여인이어서가 아니고, 때때로 병천순댓집에 들러 소주 한 잔 마실 줄 아는 그런 여인이어서도 아니다. 총각 때 헤어진 첫사랑의 여인은 더더구나 아니다.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은 언제나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댕기머리 차림으로 내 기억의 무대에 나타나곤 한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3월의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를 유관순 누나라고 불렀다.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누이동생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고, 고모도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내가 철이 들면서 그 호칭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똑같이 부르는 호칭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 그 여인을 내가 누나라고 부르면 아버지는 조카딸, 할아버지는 손녀딸이라고 해야 촌수가 맞다. 고모가 그녀를 언니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3월이면 생각나는 여인, 그녀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竝川)에서 태어났다. 나이로 따지면 2011년 올해 아흔아홉 살, 나보다는 무려 서른 살이나 연상이다. 나이차가 많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나보다 촌수가 두 단계나 높으신 할아버지까지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일이 아닌 듯싶다.
지난 3월 1일,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전주에서는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애국선열들의 한 맺힌 눈물일까.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던 승용차가 전라도를 벗어나 충청도에 이르자 비는 눈발로 바뀌어 흩날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먼 산마루에는 고희를 넘긴 어르신들의 머리카락처럼 희끗희끗 눈이 덮여 있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는 눈이 내리자마자 녹아버려 다행이었다.
오전 10시쯤 아우내[竝川]를 거쳐 독립기념관에 이르렀다. 10여 년 전보다 주위환경이 많이 개발되어 눈길을 끌었다. 전시장을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역사지만 다시 살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투사들의 투혼이 감동스럽고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숨져간 독립투사들의 최후를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더라면 나도 저 애국자들처럼 목숨을 버릴 각오로 독립투사가 될 수 있었을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신 독립투사들이 더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올 3월 1일은 제92주년 3‧1절. 독립기념관에는 많은 태극기들이 게양되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앞날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반가웠다. 3‧1절은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백성들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리는 날이다. 이 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218개 군 가운데서 211개 군으로 번져 나갔다고 한다.
대한독립만세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유관순 누나는 사촌언니 유예도와 더불어 그녀의 고향인 아우내장터[충남 천안시 병천(竝川)]에서 4월 1일 장날을 택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었다. 일본 헌병에게 붙잡힌 유관순 누나는 심한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날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할 때 19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니 일제가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었는지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3‧1운동 때 전국적으로 구속된 사람이 무려 4만 7백여 명이고, 목숨을 잃은 이들이 무려 7천 5백 9명이었다니 얼마나 처절한 독립투쟁이었던가?
이화학당 1학년생이던 유관순 누나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1920년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의 황족 방자(芳子)의 결혼을 축하하고자 사면감형이 되어 1921년 1월 2일이면 출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유관순 누나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꽃다운 나이 열여덟 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인가?
당시 10대 소녀였던 유관순 누나는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큰소리로 이렇게 호령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죄 없는 우리 동포를 수없이 죽였으니,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그런 너희가 어찌 재판을 하겠단 말이냐?"
우리는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 또는 소설작품에서 유관순 누나를 자주 만났었다. 그 작품 속에서 유관순 누나는 언제나 10대 소녀로 나온다. 그런데 세월이란 엘리베이터를 탄 나는 어느새 청년과 장년을 거쳐 노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소년시절에 불렀던 누나라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려니 거북스럽다. 그래서 나는 '누나'란 호칭 대신에 '열사'란 호칭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유관순 열사! 갑자기 거리가 멀어진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제야 제대로 호칭을 부르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 한 번 입에 익은 호칭을 바꾸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꾸 부르게 되면 곧 익숙해지려니 싶다.
독립투사들 중에는 의사(義士)도 있고 열사(烈士)도 있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처럼 정의를 위해 무력으로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분들은 의사라 부르고, 이준과 유관순처럼 정의를 위해 맨몸으로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분들에겐 열사란 호칭을 붙여드리는 게 옳다.
유관순 열사, 배달겨레의 후손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그렇게 불러야 하리라. 그러면 촌수가 헷갈리지도 않을 게 아닌가? 유관순 열사, 그녀는 언제나 3월이면 생각나는 겨레의 연인이다.
(2011.3.14.)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 등단/《수필아, 고맙다》등 수필집 11권, 수필평론집《수필의 맛 수필의 멋》/ 한국수필상, 펜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전라북도문화상, 목정문화상 등 다수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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