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설에 부쳐/윤근택
2012.09.10 06:43
패설(悖說)에 부쳐
-작은 수필론-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양심적으로, 내가 수필 나부랭이를 사반세기 동안 써 왔고, 남의 수필도 더러 읽어 왔지만, 시쳇말로 뭐 ‘쌈빡한’ 거 없었다. 그런데 비해, 몇몇 모이면 마치 내기라도 하듯 시작하여 이어가기 식으로 하게 되는 패설. 그 이야기는 언제고 배꼽을 잡을만치 재미있다. 매번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적에 느끼는 점이지만, 최초로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의 지혜로움이나 재치나 말솜씨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네 수필가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나를 포함해 거의 엉터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여러 분야에서 이른바, ‘생활의 달인(達人)’이 있는데 반해, 수필작가들 가운데는 ‘달인’이라고 할만한 문장가를 쉬이 내세울 수 없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패설 가운데 내가 고전이라고 내세울만 한 게 있다. 소위, ‘ㅈ도(ㅈ島) 시리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문답형태로 해야 제법 재미난다.
ㄱ :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있는 섬은?
ㄴ : ?
ㄱ: ㅈ도. ㅈ도 우두머리 직함은?
ㄴ: ?
ㄱ: ㅈ대가리. ㅈ도 특산까치 이름은?
ㄴ: ?
ㄱ: ㅈ같이. ㅈ까치가 날아다니니 공공 짖어대는 개 이름은?
ㄴ: ?
ㄱ: ㅈ나게. 그곳에 커다란 저수지 두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ㄴ: ?
ㄱ: ㅈ지,ㅂ지.
…
이렇게 한없이 이어지는 ㅈ도 시리즈를 웬만한 이는 한 두 차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곳 대교(大橋) 이름이 ‘할랑교?’, ‘말랑교?’라고 하기도 하고, 절 이름이 복상사(腹上死)이고 주지스님의 이름이 ‘마구핥아’이고,비구니 스님이 ‘사타구니’라고도 한다. 참으로 길게 연쇄적으로 끌고 간 게 인상적이다. 그리고 끝에 이르면, 그 ‘ㅈ도 여행’을 막 끝내고 돌아오다가 마주친 이정표에 ‘ㅈ도 아님’이란 문구가 쓰여 있었다는 게 압권이다. 거의 철학적 수준에까지 가 있다. 우리의 삶이 그저 통속하다는.
그런가 하면, 최근에 들은 ‘이웃집 아저씨가 죽었다’ 이야기도 내가 즐겨 임의로운 부인들한테 전해주는 이야기다. 내용은 이렇다.
예전에 쌍둥이가 살았다. 엄마는 형아야에게는 늘 젖이 많이 나오는 오른쪽 젖꼭지를 물렸다. 동생한테는 늘 젖이 덜 나오는 왼쪽 젖꼭지를 물렸다. 어느날 화가 난 동생은 형아야를 골려줄 요량으로, 형아야가 무는 오른쪽 젖꼭지에다 극약을 발라두었다. 이튿날 아침, 아파트 이웃집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 사인(事因)은 극약 중독이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머리를 약간 써서 들어야 제 맛이다.
또, 어제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서울에 싹아지 없는 둘째며느리가 살았다. 며느리는 갖은 아양을 떨며, 시골 시어른께 편지를 적었다. 한여름 내내 시골 한번 내려가지 않은 여인이었다. 요지는, ‘아버님,저희에게 쌀 한 가마니만 부쳐 주실래요?’ 였다. 편지를 받은 무지렁이 노인은 이장댁에 그 편지를 들고 가서 읽어달라고 했다. 노인은 ‘우케’가 덜 말라서 당장은 쌀을 보낼 수 없어, 부득이 기별을 해야만 했다. 바람벽에 붙은 달력을 ‘북’ 찢었다. 그 달력은 어느 소주제조 회사에서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요염한 자태의 여배우가 비키니바람으로 서 있는 달력이었다. 노인은 그 모델의 팬티에다 검댕이로 새까맣게 칠을 한 다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그 편지를 받아본 며느리는 영문을 몰라, 남편한테 ‘졸라’ 물어댔다. 남편은, ‘십칠일날’ 쌀을 부쳐주신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정말로 둘째며느리는 십칠일날 쌀을 받았다. 먹어보니 쌀이 너무도 좋았다. 친정이야 이웃이야 마구 퍼내고 보니 쌀이 이내 떨어졌다. 둘째며느리는 다시 편지를 적었다. 우리 아버님 벼농사가 최고라는 등 말을 적어가지고서. 노인은 이번에도 달력을 ‘북’ 찢었다. 이번엔 그 뒷면에다 바나나를 크게 그렸다. 껍질을 벗긴 바나나 그림이었다. 편지를 받아본 며느리. 남편한테 물었더니 뭐라고 했게?
그 답은, ‘ㅈ 까는 소리 하고 있네.’ .
이 이야기도 재미 자체를 넘어, 잠시 뭔가 생각하게 만든다. 아울러, 이 이야기를 최초로 만든 장본인의 재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난전에 할머니가 쑥,달래,냉이 등 봄 산채를 뜯어 무더기무더기 놓고 팔고 있었다. 하산한 등산복 차림의 중년남자는 본디 짓궂은 데가 많은 이였다.
“할매요, 이 달래 한 무더기는 얼마에요?”
이에, 할머니는 천원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중년남자는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면서 ‘쑥 넣으면’ 얼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천오백 원이라고 답했다. 이 쫀쫀한 남자는 그냥 사면 될 것을, 쑥과 달래를 한데 뭉쳤다가 떼었다가 거듭하면서, ‘쑥 넣으면 얼마냐 쑥 빼면 얼마냐?’ 짜증나리만큼 물어댔다.
할매니가 뭐라고 했게?
“이 보소, 젊은 양반, 자꾸 만지면 물 생겨!”
이밖에도 흔히 일본식 언어라 유감이긴 하지만, 외담(猥談)이라고 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내가 굳이 전하지 않더라도, 독자님 여러분께서는 음으로 양으로 들어서, 오히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밤 왜 내가 이처럼 몇 가지 패설을 옮기느냐에 관해서만은 밝혀야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수필작가들이 대오각성해야 함을 말하고픈 것이다. 고작 신변잡기류의 글을, 그것도 이차원 삼차원 독자들이 머리를 써서 읽을만한 글들을 좀처럼 빚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탄식한다. 독자의 수준은 머리 꼭대기에 있는데, ‘묘사’를 하지 않고 ‘설명’하려 드는 문장도 문제다. 무엇보다도, 재미나는 글을 적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크게 반성해야 한다. 우리말의 뜻을 패설에서처럼 중첩하여, 읽는 이에 따라 색다른 맛이 나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숙제다. 소재의 한계도 문제다. 특히, 대개의 여성 수필가들이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몇 몇 여성수필가들은 거의 파격적인 글을 쓰기도 한다. 심지어, 적나라한 성(性)에 관한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적는 이도 있기는 하다.
요컨대, 패설처럼 비교적 재미나는 글을 적어보도록 애써 볼 일이다. 비록, ‘생활의 달인’의 주인공들처럼 완벽한 문장가는 못 될지라도… .
* 이 글은 인터넷 (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작품/논문>미발표작(수필론)과, 동(同) 사이트 ‘강의실’)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작은 수필론-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양심적으로, 내가 수필 나부랭이를 사반세기 동안 써 왔고, 남의 수필도 더러 읽어 왔지만, 시쳇말로 뭐 ‘쌈빡한’ 거 없었다. 그런데 비해, 몇몇 모이면 마치 내기라도 하듯 시작하여 이어가기 식으로 하게 되는 패설. 그 이야기는 언제고 배꼽을 잡을만치 재미있다. 매번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적에 느끼는 점이지만, 최초로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의 지혜로움이나 재치나 말솜씨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네 수필가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나를 포함해 거의 엉터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여러 분야에서 이른바, ‘생활의 달인(達人)’이 있는데 반해, 수필작가들 가운데는 ‘달인’이라고 할만한 문장가를 쉬이 내세울 수 없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패설 가운데 내가 고전이라고 내세울만 한 게 있다. 소위, ‘ㅈ도(ㅈ島) 시리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문답형태로 해야 제법 재미난다.
ㄱ :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있는 섬은?
ㄴ : ?
ㄱ: ㅈ도. ㅈ도 우두머리 직함은?
ㄴ: ?
ㄱ: ㅈ대가리. ㅈ도 특산까치 이름은?
ㄴ: ?
ㄱ: ㅈ같이. ㅈ까치가 날아다니니 공공 짖어대는 개 이름은?
ㄴ: ?
ㄱ: ㅈ나게. 그곳에 커다란 저수지 두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ㄴ: ?
ㄱ: ㅈ지,ㅂ지.
…
이렇게 한없이 이어지는 ㅈ도 시리즈를 웬만한 이는 한 두 차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곳 대교(大橋) 이름이 ‘할랑교?’, ‘말랑교?’라고 하기도 하고, 절 이름이 복상사(腹上死)이고 주지스님의 이름이 ‘마구핥아’이고,비구니 스님이 ‘사타구니’라고도 한다. 참으로 길게 연쇄적으로 끌고 간 게 인상적이다. 그리고 끝에 이르면, 그 ‘ㅈ도 여행’을 막 끝내고 돌아오다가 마주친 이정표에 ‘ㅈ도 아님’이란 문구가 쓰여 있었다는 게 압권이다. 거의 철학적 수준에까지 가 있다. 우리의 삶이 그저 통속하다는.
그런가 하면, 최근에 들은 ‘이웃집 아저씨가 죽었다’ 이야기도 내가 즐겨 임의로운 부인들한테 전해주는 이야기다. 내용은 이렇다.
예전에 쌍둥이가 살았다. 엄마는 형아야에게는 늘 젖이 많이 나오는 오른쪽 젖꼭지를 물렸다. 동생한테는 늘 젖이 덜 나오는 왼쪽 젖꼭지를 물렸다. 어느날 화가 난 동생은 형아야를 골려줄 요량으로, 형아야가 무는 오른쪽 젖꼭지에다 극약을 발라두었다. 이튿날 아침, 아파트 이웃집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 사인(事因)은 극약 중독이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머리를 약간 써서 들어야 제 맛이다.
또, 어제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서울에 싹아지 없는 둘째며느리가 살았다. 며느리는 갖은 아양을 떨며, 시골 시어른께 편지를 적었다. 한여름 내내 시골 한번 내려가지 않은 여인이었다. 요지는, ‘아버님,저희에게 쌀 한 가마니만 부쳐 주실래요?’ 였다. 편지를 받은 무지렁이 노인은 이장댁에 그 편지를 들고 가서 읽어달라고 했다. 노인은 ‘우케’가 덜 말라서 당장은 쌀을 보낼 수 없어, 부득이 기별을 해야만 했다. 바람벽에 붙은 달력을 ‘북’ 찢었다. 그 달력은 어느 소주제조 회사에서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요염한 자태의 여배우가 비키니바람으로 서 있는 달력이었다. 노인은 그 모델의 팬티에다 검댕이로 새까맣게 칠을 한 다음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그 편지를 받아본 며느리는 영문을 몰라, 남편한테 ‘졸라’ 물어댔다. 남편은, ‘십칠일날’ 쌀을 부쳐주신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정말로 둘째며느리는 십칠일날 쌀을 받았다. 먹어보니 쌀이 너무도 좋았다. 친정이야 이웃이야 마구 퍼내고 보니 쌀이 이내 떨어졌다. 둘째며느리는 다시 편지를 적었다. 우리 아버님 벼농사가 최고라는 등 말을 적어가지고서. 노인은 이번에도 달력을 ‘북’ 찢었다. 이번엔 그 뒷면에다 바나나를 크게 그렸다. 껍질을 벗긴 바나나 그림이었다. 편지를 받아본 며느리. 남편한테 물었더니 뭐라고 했게?
그 답은, ‘ㅈ 까는 소리 하고 있네.’ .
이 이야기도 재미 자체를 넘어, 잠시 뭔가 생각하게 만든다. 아울러, 이 이야기를 최초로 만든 장본인의 재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난전에 할머니가 쑥,달래,냉이 등 봄 산채를 뜯어 무더기무더기 놓고 팔고 있었다. 하산한 등산복 차림의 중년남자는 본디 짓궂은 데가 많은 이였다.
“할매요, 이 달래 한 무더기는 얼마에요?”
이에, 할머니는 천원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중년남자는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면서 ‘쑥 넣으면’ 얼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천오백 원이라고 답했다. 이 쫀쫀한 남자는 그냥 사면 될 것을, 쑥과 달래를 한데 뭉쳤다가 떼었다가 거듭하면서, ‘쑥 넣으면 얼마냐 쑥 빼면 얼마냐?’ 짜증나리만큼 물어댔다.
할매니가 뭐라고 했게?
“이 보소, 젊은 양반, 자꾸 만지면 물 생겨!”
이밖에도 흔히 일본식 언어라 유감이긴 하지만, 외담(猥談)이라고 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내가 굳이 전하지 않더라도, 독자님 여러분께서는 음으로 양으로 들어서, 오히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밤 왜 내가 이처럼 몇 가지 패설을 옮기느냐에 관해서만은 밝혀야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수필작가들이 대오각성해야 함을 말하고픈 것이다. 고작 신변잡기류의 글을, 그것도 이차원 삼차원 독자들이 머리를 써서 읽을만한 글들을 좀처럼 빚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탄식한다. 독자의 수준은 머리 꼭대기에 있는데, ‘묘사’를 하지 않고 ‘설명’하려 드는 문장도 문제다. 무엇보다도, 재미나는 글을 적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크게 반성해야 한다. 우리말의 뜻을 패설에서처럼 중첩하여, 읽는 이에 따라 색다른 맛이 나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숙제다. 소재의 한계도 문제다. 특히, 대개의 여성 수필가들이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몇 몇 여성수필가들은 거의 파격적인 글을 쓰기도 한다. 심지어, 적나라한 성(性)에 관한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적는 이도 있기는 하다.
요컨대, 패설처럼 비교적 재미나는 글을 적어보도록 애써 볼 일이다. 비록, ‘생활의 달인’의 주인공들처럼 완벽한 문장가는 못 될지라도… .
* 이 글은 인터넷 (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작품/논문>미발표작(수필론)과, 동(同) 사이트 ‘강의실’)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