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수필가의 아내/최대관
2012.11.10 05:43
초보수필가의 아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최 대 관
나는 금년 가을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므로 나는 초보 수필가가 되었다. 나의 최종학력은 대학졸업이지만 남들처럼 박사나 교수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한 괴리감(Complex)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명색이 수필가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붙었으니 다소 위안이 된다.
나는 금년 3월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반’에 등록하고 60이 넘어 문학에 첫발을 디뎠으니 늦깎이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는 했으나 기초가 부족한 탓에 터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글을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평소에는 별 불편 없이 사용했던 한글맞춤법이며 띄어쓰기의 어려움을 새삼 느꼈다. 다행이도 지도교수님이 나보다는 훨씬 연상이시고 소탈하신 분이기에 마음의 부담은 덜었다.
흔히 수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학창시절 문예반을 연상하여 젊고 발랄한 사람들만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수필반에 와보니 절반정도는 현직에서 물러나신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었다. 이것 또한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매주 최소한 한 편정도의 수필을 써서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떨리는 가슴으로 퇴고를 기다렸다. 그러다보니 잘 썼건 못 썼건 간에 30여 편 정도의 작품을 완성했다. 기성작가라 해서 쓰는 글마다 명작이 될 수는 없고, 유명한 감독이 제작한 영화도 흥행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도 많지 않던가. 磁器(자기)를 굽는 陶工(도공)은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 이하의 작품은 비정하리만큼 부셔버린다. 하물며 자신의 체중도 이기지 못하고 뒤뚱거리며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애 같은 나의 작품이야 오죽했으랴. 하지만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앉아만 있다면 영영 걸음마를 배울 수 없듯, 남의 혹평이 두려워 글쓰기를 포기한다면 더 나이 들어 가슴을 치며 후회할 날이 꼭 오고 말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편, 아니 수백 편의 영화를 감상했지만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는 과연 몇 편이나 될까? 벤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기적, 십계 같은 영화는 수십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듯, 내 손으로 직접 쓴 글들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도공이 자기가 구운 자기를 부셔버리듯 버리고 싶은 작품들도 있다.
응모당시 3편을 제출하라는 ‘대한문학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심 사납게 4편을 골라 퇴고를 거듭하여 제출했다. ‘남편의 자격증’ 외 3편, 도합 4편의 작품을 제출한 이유는, 3편중에서 당선될 만한 작품이 없으면 탈락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한 편은 보너스(Bonus)로 더 제출한 것이다. 그 작품들의 내용이 모두 내 집안에 관한 이야기들이고 특히나 아내와 아들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작품을 제출할 때까지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혹여 낙방이라도 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는가? 다행히 당선은 되었다. 과연 몇 분이나 수필부문에 응모하여 7명이 당선되었는지도 궁금하다. ‘대한문학 겨울호’에 신인 문학상 당선자들의 사진과 작품들이 실렸다. 간단한 약력과 사진도 함께 게재되었다. 나의 사진 및 작품이 맨 뒤에 실린 것을 보면 아마 꼴찌로 당선된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꼴지라도 좋으니 당선된 게 감사할 뿐이다. 금번에 낙방했더라면 또 얼마나 가슴조이며 기다려야 할 것인가, 그것이 두려웠다.
여기에 실린 나의 사진은 88년에 여권을 만들고자 촬영한 사진이니 무려 25년 전의 사진이다. 나는 작품의 내용보다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나는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25년 전의 역사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처럼 곱고 젊었을 때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 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25년 후의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는 게 두렵다.
나의 글이 난생 처음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왔다. 대한문학에서 보내준 70여권의 수필집을 선물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보니 100명이 훨씬 넘었다. 여기에서도 옥석은 가려야겠다.
나보다는 아내가 더 신바람이 난 것 같다. 동네 슈퍼아줌마, 미장원아줌마 그리고 손님들에게도 수필집을 공짜로 나누어주며 조금은 더 보태어 남편을 자랑하는가 보다. 만약에 내가 군의원이라도 됐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하기야 한 동네에 사는 현 군의원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고 아내는 말하곤 한다.
이제 내 아내는 시골 구멍가게 아줌마에서 일약 초보수필가의 아내로 등극했다. 아내도 내 글을 읽었나보다. 작품이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 고생만 시키고도 미안해 할 줄도 모르는 남편인 줄 알았는데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서비스가 달라졌다.
며칠 전에 ‘대한문학’에서 한 통의 우편물이 집에 도착했다. 내용인즉 11월 17일(토요일)에 대한문학에서 주최하는 신인상수상자에 대한 시상식이 있으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아내의 눈치가 이상했다.
나는 신한카드를, 아내는 현대카드를 사용한다. 어제 아침 출근준비를 하는 나에게 내 신용카드를 좀 달라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할부로 사야할 것이 있는데 현대카드로는 안된다기에 별 생각 없이 카드를 주고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집에 와보니 옷장에 아내의 새 옷이 걸려있었다. 순간 나는 ‘아하, 아내가 저 옷을 입고 내 대한문학제행사에 참석하여 축하해주려고 그랬구나!’ 괜히 코끝이 찡했다.
아내는 나보다 생각이 깊다. 초보수필가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자상하고 능력 있고 가슴 따뜻한 남편이 최고일 텐데 말이다.
(2012. 11. 10.)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최 대 관
나는 금년 가을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므로 나는 초보 수필가가 되었다. 나의 최종학력은 대학졸업이지만 남들처럼 박사나 교수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한 괴리감(Complex)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명색이 수필가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붙었으니 다소 위안이 된다.
나는 금년 3월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반’에 등록하고 60이 넘어 문학에 첫발을 디뎠으니 늦깎이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는 했으나 기초가 부족한 탓에 터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글을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평소에는 별 불편 없이 사용했던 한글맞춤법이며 띄어쓰기의 어려움을 새삼 느꼈다. 다행이도 지도교수님이 나보다는 훨씬 연상이시고 소탈하신 분이기에 마음의 부담은 덜었다.
흔히 수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학창시절 문예반을 연상하여 젊고 발랄한 사람들만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수필반에 와보니 절반정도는 현직에서 물러나신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었다. 이것 또한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매주 최소한 한 편정도의 수필을 써서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떨리는 가슴으로 퇴고를 기다렸다. 그러다보니 잘 썼건 못 썼건 간에 30여 편 정도의 작품을 완성했다. 기성작가라 해서 쓰는 글마다 명작이 될 수는 없고, 유명한 감독이 제작한 영화도 흥행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도 많지 않던가. 磁器(자기)를 굽는 陶工(도공)은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 이하의 작품은 비정하리만큼 부셔버린다. 하물며 자신의 체중도 이기지 못하고 뒤뚱거리며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애 같은 나의 작품이야 오죽했으랴. 하지만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앉아만 있다면 영영 걸음마를 배울 수 없듯, 남의 혹평이 두려워 글쓰기를 포기한다면 더 나이 들어 가슴을 치며 후회할 날이 꼭 오고 말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편, 아니 수백 편의 영화를 감상했지만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는 과연 몇 편이나 될까? 벤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기적, 십계 같은 영화는 수십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듯, 내 손으로 직접 쓴 글들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도공이 자기가 구운 자기를 부셔버리듯 버리고 싶은 작품들도 있다.
응모당시 3편을 제출하라는 ‘대한문학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심 사납게 4편을 골라 퇴고를 거듭하여 제출했다. ‘남편의 자격증’ 외 3편, 도합 4편의 작품을 제출한 이유는, 3편중에서 당선될 만한 작품이 없으면 탈락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한 편은 보너스(Bonus)로 더 제출한 것이다. 그 작품들의 내용이 모두 내 집안에 관한 이야기들이고 특히나 아내와 아들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작품을 제출할 때까지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혹여 낙방이라도 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는가? 다행히 당선은 되었다. 과연 몇 분이나 수필부문에 응모하여 7명이 당선되었는지도 궁금하다. ‘대한문학 겨울호’에 신인 문학상 당선자들의 사진과 작품들이 실렸다. 간단한 약력과 사진도 함께 게재되었다. 나의 사진 및 작품이 맨 뒤에 실린 것을 보면 아마 꼴찌로 당선된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꼴지라도 좋으니 당선된 게 감사할 뿐이다. 금번에 낙방했더라면 또 얼마나 가슴조이며 기다려야 할 것인가, 그것이 두려웠다.
여기에 실린 나의 사진은 88년에 여권을 만들고자 촬영한 사진이니 무려 25년 전의 사진이다. 나는 작품의 내용보다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나는 타임머신(Time Machine)을 타고 25년 전의 역사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처럼 곱고 젊었을 때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 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25년 후의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는 게 두렵다.
나의 글이 난생 처음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왔다. 대한문학에서 보내준 70여권의 수필집을 선물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보니 100명이 훨씬 넘었다. 여기에서도 옥석은 가려야겠다.
나보다는 아내가 더 신바람이 난 것 같다. 동네 슈퍼아줌마, 미장원아줌마 그리고 손님들에게도 수필집을 공짜로 나누어주며 조금은 더 보태어 남편을 자랑하는가 보다. 만약에 내가 군의원이라도 됐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하기야 한 동네에 사는 현 군의원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고 아내는 말하곤 한다.
이제 내 아내는 시골 구멍가게 아줌마에서 일약 초보수필가의 아내로 등극했다. 아내도 내 글을 읽었나보다. 작품이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 고생만 시키고도 미안해 할 줄도 모르는 남편인 줄 알았는데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서비스가 달라졌다.
며칠 전에 ‘대한문학’에서 한 통의 우편물이 집에 도착했다. 내용인즉 11월 17일(토요일)에 대한문학에서 주최하는 신인상수상자에 대한 시상식이 있으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아내의 눈치가 이상했다.
나는 신한카드를, 아내는 현대카드를 사용한다. 어제 아침 출근준비를 하는 나에게 내 신용카드를 좀 달라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할부로 사야할 것이 있는데 현대카드로는 안된다기에 별 생각 없이 카드를 주고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집에 와보니 옷장에 아내의 새 옷이 걸려있었다. 순간 나는 ‘아하, 아내가 저 옷을 입고 내 대한문학제행사에 참석하여 축하해주려고 그랬구나!’ 괜히 코끝이 찡했다.
아내는 나보다 생각이 깊다. 초보수필가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자상하고 능력 있고 가슴 따뜻한 남편이 최고일 텐데 말이다.
(2012.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