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2012.12.29 09:25
아버지
김 학
“아버지, 별고 없으시죠? 남쪽지방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데 전주는 괜찮아요? 외출하실 때 조심하세요.”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이른 아침, 큰아들의 안부 전화를 받았다. 큰아들의 전화를 받으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하다. 덩달아 밥맛도 좋아지고 살맛이 난다.
큰아들은 날씨가 춥거나 더울 때,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올 때면 어김없이 안부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고 나면 나는 아내에게
“우리 큰아들은 참 효자야. 복을 많이 받을 거야!”
라고 기도하듯 말을 한다. 아내도 동감하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인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철이 없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나는 아버지에게 어린양을 해보지도 못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란 호칭조차 가져가 버리셨다.
일곱 살 때 어느 가을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에서는 울음소리가 났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전주Y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다. 고향집 우물가에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던 단 한 가지 기억밖에 없다. 자라면서 아버지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더니 입에 거미줄이 쳤는지 아버지란 호칭은 나에겐 외국어처럼 여겨졌다. 장가를 간 뒤에도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를 수가 없었다. 서른한 살에 홀로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차마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 입은 아버지란 호칭을 불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내 귀는 그 호칭을 많이 들었다. 내가 결혼하여 2남1녀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날마다 몇 번씩 아버지라고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 단어는 내 입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내 귀에는 익숙해진 호칭이다.
부모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난 교사라고 했던가?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다. 물론 어머니가 아버지 몫까지 가르치셨지만 아무래도 미흡할 수밖에. 그러니 나는 아버지노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버지 역할을 배우고자 가정교사를 둘 형편도 아니었고, 또 다른 명문가 집안으로 유학을 가서 배울 형편도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친구들의 아버지를 눈여겨보고 배우며, 문학작품이나 영화 속의 아버지를 모델 삼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이들처럼 제대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였고, 2남1녀를 낳았다.
나는 매주 일요일 밤 KBS-2TV의 <개그 콘서트>를 즐겨 본다. 그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코너가 있는데 그 중 <아버지와 아들>이란 코너가 나의 관심을 끈다. 100kg이 넘는 거구의 부자(아버지 유민상, 아들 김수영)가 출연하여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나는 그 반복개그를 보면서 나도 우리 아이들과 한 번 흉내를 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 코너에서 현대판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새로운 아버지상을 배운다.
불혹의 고개에 다다른 큰아들도 벌써 결혼한 지 10년쯤 된다. 큰아들은 지금 아홉 살짜리 아들과 세 살짜리 딸, 남매를 두었다. 내가 아들딸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큰아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아버지 노릇을 참 잘한다. 고희를 넘긴 내가 부러울 정도다.
쉬는 날이면 가끔 제 가족들과 외식도 하고, 국내외여행도 다니며,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기도 한다. 아들과는 야구장이나 수영장에도 같이 가고 함께 등산도 한다. 어린 딸은 목마도 태워주고, 얼굴을 마주보며 웃기기도 하며 아빠의 정을 나눈다. 아이들이 제 엄마보다 아빠를 더 따를 정도로 사이가 좋다. 작은 아들이나 딸도 큰아들과 다를 바 없다.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처럼 자녀들과 잘 소통하며 지낸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가슴에 때늦은 반성문을 쓰곤 한다. 나도 2남1녀를 키우면서 아버지노릇이 하기 싫어서 소홀히 한 게 아니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나와 아내는 맞벌이부부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손자손녀들을 몹시 귀여워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이들과 잘 어울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 덕에 아이들은 할머니를 무척이나 잘 따랐고, 할머니와 손자손녀들의 정은 끈끈하고 깊어졌다. 하지만, 부모인 우리 내외와 자녀들의 사랑 쌓기는 조금 소홀해 진 게 사실이다. 그 때문에 우리 부부는 뒤늦게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2012. 12. 31.)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 등단/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전라북도문화상, 목정문화상 등 다수 수상/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mail: 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http://blog.daum.net/crane43
김 학
“아버지, 별고 없으시죠? 남쪽지방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데 전주는 괜찮아요? 외출하실 때 조심하세요.”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이른 아침, 큰아들의 안부 전화를 받았다. 큰아들의 전화를 받으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하다. 덩달아 밥맛도 좋아지고 살맛이 난다.
큰아들은 날씨가 춥거나 더울 때,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올 때면 어김없이 안부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고 나면 나는 아내에게
“우리 큰아들은 참 효자야. 복을 많이 받을 거야!”
라고 기도하듯 말을 한다. 아내도 동감하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인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철이 없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나는 아버지에게 어린양을 해보지도 못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란 호칭조차 가져가 버리셨다.
일곱 살 때 어느 가을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에서는 울음소리가 났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전주Y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다. 고향집 우물가에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던 단 한 가지 기억밖에 없다. 자라면서 아버지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더니 입에 거미줄이 쳤는지 아버지란 호칭은 나에겐 외국어처럼 여겨졌다. 장가를 간 뒤에도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니, 부를 수가 없었다. 서른한 살에 홀로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차마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 입은 아버지란 호칭을 불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내 귀는 그 호칭을 많이 들었다. 내가 결혼하여 2남1녀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날마다 몇 번씩 아버지라고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 단어는 내 입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내 귀에는 익숙해진 호칭이다.
부모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난 교사라고 했던가?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다. 물론 어머니가 아버지 몫까지 가르치셨지만 아무래도 미흡할 수밖에. 그러니 나는 아버지노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버지 역할을 배우고자 가정교사를 둘 형편도 아니었고, 또 다른 명문가 집안으로 유학을 가서 배울 형편도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친구들의 아버지를 눈여겨보고 배우며, 문학작품이나 영화 속의 아버지를 모델 삼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이들처럼 제대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였고, 2남1녀를 낳았다.
나는 매주 일요일 밤 KBS-2TV의 <개그 콘서트>를 즐겨 본다. 그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코너가 있는데 그 중 <아버지와 아들>이란 코너가 나의 관심을 끈다. 100kg이 넘는 거구의 부자(아버지 유민상, 아들 김수영)가 출연하여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나는 그 반복개그를 보면서 나도 우리 아이들과 한 번 흉내를 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 코너에서 현대판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새로운 아버지상을 배운다.
불혹의 고개에 다다른 큰아들도 벌써 결혼한 지 10년쯤 된다. 큰아들은 지금 아홉 살짜리 아들과 세 살짜리 딸, 남매를 두었다. 내가 아들딸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큰아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아버지 노릇을 참 잘한다. 고희를 넘긴 내가 부러울 정도다.
쉬는 날이면 가끔 제 가족들과 외식도 하고, 국내외여행도 다니며,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기도 한다. 아들과는 야구장이나 수영장에도 같이 가고 함께 등산도 한다. 어린 딸은 목마도 태워주고, 얼굴을 마주보며 웃기기도 하며 아빠의 정을 나눈다. 아이들이 제 엄마보다 아빠를 더 따를 정도로 사이가 좋다. 작은 아들이나 딸도 큰아들과 다를 바 없다. 아동심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처럼 자녀들과 잘 소통하며 지낸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가슴에 때늦은 반성문을 쓰곤 한다. 나도 2남1녀를 키우면서 아버지노릇이 하기 싫어서 소홀히 한 게 아니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나와 아내는 맞벌이부부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손자손녀들을 몹시 귀여워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이들과 잘 어울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 덕에 아이들은 할머니를 무척이나 잘 따랐고, 할머니와 손자손녀들의 정은 끈끈하고 깊어졌다. 하지만, 부모인 우리 내외와 자녀들의 사랑 쌓기는 조금 소홀해 진 게 사실이다. 그 때문에 우리 부부는 뒤늦게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2012. 12. 31.)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 등단/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전라북도문화상, 목정문화상 등 다수 수상/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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