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장모님과 선배 문우님들/김득수
2013.07.03 06:44
장인장모님과 선배 문우님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김득수
장인과 장모님은 올해로 여든하나, 일흔일곱이시다. 김제에서 밭일을 하시며 살다가 십 수 년 전 다 정리하시고 자식들이 살고 있는 전주로 오셨다. 아파트는 답답하다며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사신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셨는데 귀한 아들이 막내이고 셋째 딸은 나와 살고 있다.
두 분 모두 매우 부지런하시고 일을 좋아하시어 집안에 가만 계시질 않는다. 편히 사시려 하질 않는다. 옛날 어르신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자연스레 몸에 밴 생활이겠지만 우리 장인 장모님은 유달리 부지런하시고 동적이시다. 비교적 건강한 몸도 한 몫 하려니와 나태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게 분명 있으시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시고 매사에 원만하시다.
전주에 오신 뒤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거의 쉬는 날이 없으시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신다. 몇 해 전부터 남부시장에 나가 파 작업을 하신다. 시장까지는 5km 이상 떨어져 있어 동틀 무렵에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오후 4시까지 일을 하고 일당 4만원을 받는다. 누구보다도 두 분은 즐겁게 일을 하신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하는 힘든 노동이 아니라 휘파람 불며 친구들과 즐거운 일파티를 하신다. 즐겁게 하시니 일의 성과도 좋으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일당을 더 받는다.
셋째 딸인 나의 아내는 그것을 빼닮아 사회생활도 잘하고 항상 열심히 일을 하며 산다. 집에 축 처져있다가도 밖에 나가 일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눈동자가 번득이고 얼굴에 생기가 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질색이다. 잠자는 것 말고는 우두커니 정지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장인장모님의 젊은 날 모습 같다.
그런데 장인장모님이 한동안 시장엔 통 나가시질 않았다. 이젠 힘들어 그러시려니 하였으나 실은 파 작업 일감이 줄어든 탓이다. 그러나 쉬는 날 집에만 계실 분들이 아니다. 이젠 팔아버려 남의 땅이 된 김제 밭에 가끔 가셨다. 한 귀퉁이 땅이 놀고 있자 어떻게 아셨던 모양이다. 그 뒤로 땅 주인의 허락을 얻어 파도 심고 마늘도 심어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김제까지는 70리 길, 먼 거리여서 주로 버스를 이용하는데 농작물 운반도 문제려니와 교통비도 만만치 않다. 70대 중반 어느 날은 남부시장에 다녀오듯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셨단다. 50대의 나는 자전거로 왕복은커녕 김제까지 가지도 못할 터인데…….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김제에서 살고 있는 효녀 중 효녀 둘째딸이 전주로 이사를 왔고 인근에 조그만 텃밭을 샀다. 내외간이 흙을 좋아하는 성품이고 주말농장처럼 가꾸며 노후에 시간을 보낼 요량이라 했지만 내심 장인장모님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며칠 전 아내와 바닷가로 놀러 가면서 장모님이 처형 내외와 함께 텃밭을 일구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죄송한 마음에 저녁에는 우리 집에 모시고 식사를 했는데 장모님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고 행복해 보였다. 힘들지만 땀을 흘리며 좋아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리라.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밭을 매는 처형내외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언젠가 더 이상 허리를 굽혀 일을 하실 수 없을 때 장인장모님은 밭을 매는 둘째딸 내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실 것이다.
한 달 전 나는 수필공부를 시작하였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스무 명 쯤 되는 문우 선배님들과 함께 김학 교수님에게 배우고 있다. 첫 수업에서 느낀 점인데 육칠십 고희 언저리의 연세에도 즐거운 표정으로 열심히 배우는 선배님들의 모습이 꼭 장인장모님 같았다. 이제 또 무얼 배우고 시작한단 말인가. 이론공부는 물론, 숙제발표와 감상평을 나누는 진지한 모습이 진짜 학생 같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비록 열매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과정은 농사일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최근에 등단하신 선배님 한 분은 고엽제후유증으로 희귀병을 앓고 계셨는데 일곱 번의 대수술을 하면서도 글을 쓰고 계셨다. 장인장모님에게 텃밭이 행복이라면 문우선배님들에게는 여백의 원고지가 바로 텃밭이고 꿈과 희망이었다. 더 이상 무엇을 비교하랴.
몸과 마음이 허락되는 날까지 열심히 밭을 갈고 글을 쓰는 장인장모님과 선배문우님들. 그 의지와 열정을 나는 닮고 싶다.
(2013. 6. 3.)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김득수
장인과 장모님은 올해로 여든하나, 일흔일곱이시다. 김제에서 밭일을 하시며 살다가 십 수 년 전 다 정리하시고 자식들이 살고 있는 전주로 오셨다. 아파트는 답답하다며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사신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셨는데 귀한 아들이 막내이고 셋째 딸은 나와 살고 있다.
두 분 모두 매우 부지런하시고 일을 좋아하시어 집안에 가만 계시질 않는다. 편히 사시려 하질 않는다. 옛날 어르신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자연스레 몸에 밴 생활이겠지만 우리 장인 장모님은 유달리 부지런하시고 동적이시다. 비교적 건강한 몸도 한 몫 하려니와 나태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게 분명 있으시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시고 매사에 원만하시다.
전주에 오신 뒤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거의 쉬는 날이 없으시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신다. 몇 해 전부터 남부시장에 나가 파 작업을 하신다. 시장까지는 5km 이상 떨어져 있어 동틀 무렵에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오후 4시까지 일을 하고 일당 4만원을 받는다. 누구보다도 두 분은 즐겁게 일을 하신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하는 힘든 노동이 아니라 휘파람 불며 친구들과 즐거운 일파티를 하신다. 즐겁게 하시니 일의 성과도 좋으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일당을 더 받는다.
셋째 딸인 나의 아내는 그것을 빼닮아 사회생활도 잘하고 항상 열심히 일을 하며 산다. 집에 축 처져있다가도 밖에 나가 일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눈동자가 번득이고 얼굴에 생기가 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질색이다. 잠자는 것 말고는 우두커니 정지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장인장모님의 젊은 날 모습 같다.
그런데 장인장모님이 한동안 시장엔 통 나가시질 않았다. 이젠 힘들어 그러시려니 하였으나 실은 파 작업 일감이 줄어든 탓이다. 그러나 쉬는 날 집에만 계실 분들이 아니다. 이젠 팔아버려 남의 땅이 된 김제 밭에 가끔 가셨다. 한 귀퉁이 땅이 놀고 있자 어떻게 아셨던 모양이다. 그 뒤로 땅 주인의 허락을 얻어 파도 심고 마늘도 심어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김제까지는 70리 길, 먼 거리여서 주로 버스를 이용하는데 농작물 운반도 문제려니와 교통비도 만만치 않다. 70대 중반 어느 날은 남부시장에 다녀오듯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셨단다. 50대의 나는 자전거로 왕복은커녕 김제까지 가지도 못할 터인데…….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김제에서 살고 있는 효녀 중 효녀 둘째딸이 전주로 이사를 왔고 인근에 조그만 텃밭을 샀다. 내외간이 흙을 좋아하는 성품이고 주말농장처럼 가꾸며 노후에 시간을 보낼 요량이라 했지만 내심 장인장모님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며칠 전 아내와 바닷가로 놀러 가면서 장모님이 처형 내외와 함께 텃밭을 일구고 계신 모습을 보았다. 죄송한 마음에 저녁에는 우리 집에 모시고 식사를 했는데 장모님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고 행복해 보였다. 힘들지만 땀을 흘리며 좋아하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리라.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밭을 매는 처형내외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언젠가 더 이상 허리를 굽혀 일을 하실 수 없을 때 장인장모님은 밭을 매는 둘째딸 내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실 것이다.
한 달 전 나는 수필공부를 시작하였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스무 명 쯤 되는 문우 선배님들과 함께 김학 교수님에게 배우고 있다. 첫 수업에서 느낀 점인데 육칠십 고희 언저리의 연세에도 즐거운 표정으로 열심히 배우는 선배님들의 모습이 꼭 장인장모님 같았다. 이제 또 무얼 배우고 시작한단 말인가. 이론공부는 물론, 숙제발표와 감상평을 나누는 진지한 모습이 진짜 학생 같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비록 열매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과정은 농사일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최근에 등단하신 선배님 한 분은 고엽제후유증으로 희귀병을 앓고 계셨는데 일곱 번의 대수술을 하면서도 글을 쓰고 계셨다. 장인장모님에게 텃밭이 행복이라면 문우선배님들에게는 여백의 원고지가 바로 텃밭이고 꿈과 희망이었다. 더 이상 무엇을 비교하랴.
몸과 마음이 허락되는 날까지 열심히 밭을 갈고 글을 쓰는 장인장모님과 선배문우님들. 그 의지와 열정을 나는 닮고 싶다.
(2013.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