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이야기/허명기
2013.09.07 16:07
벌초 이야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허명기
예취기가 굉음을 낸다. 어린아이 키만큼 자란 풀들이 맥없이 쓰러진다. 풀숲에 숨어있던 풀벌레들이 깜짝 놀라 어디로 뛸지 야단법석이다. 조카 녀석들은 쓰러진 풀들을 갈퀴로 긁어모으느라 분주하다. 예취기 2대가 쉼 없이 돌아간다. 조상님의 묘 10여 기가 깔끔하게 머리를 깎는 순간이다.
매년 이맘때면 경향 각지에서 흩어져 사는 친족들이 조상님의 묘를 벌초하러 어김없이 찾아온다. 벌초 시기는 절기상 처서가 지난 첫 번째 토요일로 잡는다. 이때는 들에 있는 풀들이 더 자라지 않는다. 자란다 하더라도 성장세가 미약하다. 또 전통적으로 음력 8월에는 벌초를 하지 않는다는 풍습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추석날 성묘와 동시에 벌초를 하는 풍경을 볼 수도 있다. 풍습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특정 성씨 집단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보통 3대 이상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 많아 벌초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이농현상으로 가까운 친척들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바쁜 일정과 핵가족화로 함께 모여 벌초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벌초를 한다 해도 예취기 아니면 엄두를 못 낸다. 낫으로 벌초를 할 수도 있지만, 능률이 오르지 않을 뿐더러 요즘 젊은이들은 낫질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
유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벌초하러 갔던 생각이 난다. 명당을 찾아 조상님의 묘를 쓴다 하여, 거리 불문하고 높고 깊은 산 여기저기에 묘가 산재해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몇 시간이나 수풀을 헤집고 가는 곳도 있다. 이렇게 벌초를 하다 보면 3,4일은 보통이다. 그것도 낫으로 풀을 베어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도 많이 든다. 조상님 앞에서 힘들다고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벌초했던 시절이 있었다.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 인근 묘지에는 풀들이 크게 자랄 겨를이 없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일하는 소가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여물을 마련하려면 논·밭두렁과 묘지 등에 자라는 풀을 베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 대신 동력경운기가 있고 풀과 여물 대신 인공사료로 먹이를 주기 때문에 풀이 무성하게 자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1년에 2번 이상은 벌초를 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벌초할 때가 아니면 20여 명의 후손이 일시에 조상님들의 묘 앞에 모이기도 드문 일이다. 그만큼 각자의 생활전선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시대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벌초 전문 업체에 대행할까도 생각했는데 조상님을 생각하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직접 벌초를 하기로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친족 간에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고향을 떠나 생활하다 보면 거의 왕래가 힘들고 관계도 소원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벌초하는 날만큼이라도 함께 모여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돈독히 하자는데 의견을 모은 것이다. 참석범위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는 성년이상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고 일정금액의 회비도 출연하도록 했다. 우리 집안의 약속이다.
벌초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무렵, 예취기가 닿지 못한 곳은 낫으로 정성스럽게 풀을 베었다. 묘지 구역 안으로 침범한 아카시아 나무, 잡목 등은 뿌리까지 뽑아 제거했다. 시원스럽게 단장한 묘지는 보기만 해도 깔끔했다.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조상님들이 여기에 묻혀있다. 내 뿌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조상님이 이곳까지 이동해온 발자취를 조명해본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자손들이 번성할 수 있다는 고마움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벌초는 오전 중에 마무리했다. 땀 흘린 뒤 내 고향 텁텁한 무주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4촌 형님 댁에서 마련한 성찬이 이어졌다. 그리고 친족끼리 모여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선친들이 살아온 이야기, 집안 돌아가는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해가 서산을 넘어 산그늘이 드리울 즈음 우리는 내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2013. 9. 8.)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허명기
예취기가 굉음을 낸다. 어린아이 키만큼 자란 풀들이 맥없이 쓰러진다. 풀숲에 숨어있던 풀벌레들이 깜짝 놀라 어디로 뛸지 야단법석이다. 조카 녀석들은 쓰러진 풀들을 갈퀴로 긁어모으느라 분주하다. 예취기 2대가 쉼 없이 돌아간다. 조상님의 묘 10여 기가 깔끔하게 머리를 깎는 순간이다.
매년 이맘때면 경향 각지에서 흩어져 사는 친족들이 조상님의 묘를 벌초하러 어김없이 찾아온다. 벌초 시기는 절기상 처서가 지난 첫 번째 토요일로 잡는다. 이때는 들에 있는 풀들이 더 자라지 않는다. 자란다 하더라도 성장세가 미약하다. 또 전통적으로 음력 8월에는 벌초를 하지 않는다는 풍습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추석날 성묘와 동시에 벌초를 하는 풍경을 볼 수도 있다. 풍습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특정 성씨 집단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보통 3대 이상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 많아 벌초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이농현상으로 가까운 친척들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바쁜 일정과 핵가족화로 함께 모여 벌초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벌초를 한다 해도 예취기 아니면 엄두를 못 낸다. 낫으로 벌초를 할 수도 있지만, 능률이 오르지 않을 뿐더러 요즘 젊은이들은 낫질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
유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벌초하러 갔던 생각이 난다. 명당을 찾아 조상님의 묘를 쓴다 하여, 거리 불문하고 높고 깊은 산 여기저기에 묘가 산재해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몇 시간이나 수풀을 헤집고 가는 곳도 있다. 이렇게 벌초를 하다 보면 3,4일은 보통이다. 그것도 낫으로 풀을 베어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도 많이 든다. 조상님 앞에서 힘들다고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벌초했던 시절이 있었다.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마을 인근 묘지에는 풀들이 크게 자랄 겨를이 없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일하는 소가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여물을 마련하려면 논·밭두렁과 묘지 등에 자라는 풀을 베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 대신 동력경운기가 있고 풀과 여물 대신 인공사료로 먹이를 주기 때문에 풀이 무성하게 자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1년에 2번 이상은 벌초를 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벌초할 때가 아니면 20여 명의 후손이 일시에 조상님들의 묘 앞에 모이기도 드문 일이다. 그만큼 각자의 생활전선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시대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벌초 전문 업체에 대행할까도 생각했는데 조상님을 생각하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직접 벌초를 하기로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친족 간에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고향을 떠나 생활하다 보면 거의 왕래가 힘들고 관계도 소원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벌초하는 날만큼이라도 함께 모여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돈독히 하자는데 의견을 모은 것이다. 참석범위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는 성년이상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고 일정금액의 회비도 출연하도록 했다. 우리 집안의 약속이다.
벌초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무렵, 예취기가 닿지 못한 곳은 낫으로 정성스럽게 풀을 베었다. 묘지 구역 안으로 침범한 아카시아 나무, 잡목 등은 뿌리까지 뽑아 제거했다. 시원스럽게 단장한 묘지는 보기만 해도 깔끔했다.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조상님들이 여기에 묻혀있다. 내 뿌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조상님이 이곳까지 이동해온 발자취를 조명해본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자손들이 번성할 수 있다는 고마움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벌초는 오전 중에 마무리했다. 땀 흘린 뒤 내 고향 텁텁한 무주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4촌 형님 댁에서 마련한 성찬이 이어졌다. 그리고 친족끼리 모여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선친들이 살아온 이야기, 집안 돌아가는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해가 서산을 넘어 산그늘이 드리울 즈음 우리는 내년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2013.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