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출판회 낭독

2011.06.13 09:51

석정희 조회 수:386 추천: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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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송상옥 선생님 유고집 "잃어버린 말"출판기년회에서...
중편소설 "비밀을 가진 사나이" 초입, 전개,위기,결말 뼈만 추려서...

석정희 낭독 6/ 8/ 2011



<중편소설>
비밀을 가진 사나이 / 송상옥

그해 늦가을, 나는 로스앤젤레스 지사 파견요원으로서의 임기를 한 달 남짓 남겨두고 있었다. 회사의 일은 곧 끝내고 특별 휴가를 얻어 서울에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 몇 군데를 돌아본 뒤 연말에 미국 땅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꽤 긴 듯했던 이 년이란 기간이 잠깐 사이에 지나갔다.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나 나름으로 포부가 있었다. 가능하면 미국 안 여기저기에 가보고, 산 영어도 익히고, 국내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취재하고, 여러 가지 자료도 모아 간다는 따위 평범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셈이었다.
중략-
나를 실은 자동차는 한동안 어디론가 더 간 다음에 드디어 어느 건물 옆에 섰다. 큰길에 면한 높다란 건물이 아닌 뒷길에 서 있는 우중충한 낮은 건물이었고, 차가 선 곳도 건물 앞이 아니라 뒤쪽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 건물 지하에 있는 한 방에서 나는 닷새 동안 갇힌 채 갖은 고초를 겪고 심한 곤욕을 치렀다. 그때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몹시 괴롭힌 장본인이 바로 장성국이었다.
갈수록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 그임에 틀림없었다. 서슬이 퍼렇게 되어 살기 등등 날뛰던 자가,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 멀고 먼 이역 땅에서 죽은 몸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때 나는 물론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십 년 전에 당한 그 일이 마치 엊그제 당했던 것처럼 생생히 되살아났다. 가슴이 서늘해오고 몸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또한 속이 마구 뒤틀리어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심한 거부감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나는 사진기자가 뽑아준 장성국의 사진들, 운전면허증의 것과 성경책 갈피에 끼여 있던 것을 복사한 사진들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휴게실로 갔다. 나는 찬물이 나오는 꼭지를 틀어 한껏 물을 들이켰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도 모르는 열을 잔뜩 뿜어내고 있는 몸과 마음을 식히고 싶었다.
중략-
장성국이 봇물 터지듯 한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석 달 전, 그러니까 박영호와 알게 된 지 이 년 남짓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박영호는 그에 대해 별로 알지 못했다. 처음의 수준에서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불쑥불쑥 내뱉는 말에서 장성국이 신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있는 건 아니라는(신분이 어떻게 돼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리고 자기의 지난날을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비밀>의 두터운 보자기로 싼 채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가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로 박영호는 막연하나마 그에게 조금 다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보자기를 박영호 앞에 풀어헤쳐놓은 것이다.
중략-
장성국은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줄곧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내가 왜 요 모양 요 꼴로 도망다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했다는, 또는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그럴듯하게 처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불쑥불쑥 울화가 치밀고 열에 들뜬 것처럼 몸과 마음을 가누기 힘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그 이 년을 이십 년같이 보냈다.
결국 그는 그 땅을 처분하여 상당 액수를 아내에게 주고, 온갖 머리를 짜내 자기 몸과 함께 나머지를 고스란히 미국으로 들여왔다. 올림픽의 팡파르가 요란하고 화려하게 울렸던 1988년 그해 말이었다.
누구 한 사람 반겨줄 이 없는 미국하고도 로스앤젤레스에 온 그는 내내 황량한 들판에 홀로 버려진 듯 한심스럽고 어처구니없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이곳 낯선 땅 남의 나라에까지 쫓기고 도망쳐 와야 하는지 스스로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중략-
장성국.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컴컴한 무대 뒤에서나마, 세상을 부숴버릴 듯 기세등등 서슬이 퍼렇게 되어 날뛰던 사나이. 부정한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많은 사람들을 공포 속에서 떨게 하다가, 하루아침에 날개 꺾인 새가 되어 허겁지겁 도망쳐온 이국땅, 칠 년 세월 꽁꽁 숨어 지내던 끝에 깊은 골짜기 나뭇가지 사이에서 비밀에 싸인 주검으로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분노와 적개심을 키우며 자란 어린 시절, 가족을 사랑할 줄도 몰랐고, 가족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지도 못했다. 이제 그 몸을 수습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국 이곳 낯선 고장의 차가운 공동묘지에서 한줌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쯤 되면 사람의 한 세상도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것인가.
나는 공연히 울적한 마음을 한동안 가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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