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老의 우정/문경근
2013.11.05 06:31
노노(老老)의 우정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문경근
가을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날 아침, 연륜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을 교직에 종사하다 은퇴한 선생님들이 가을나들이를 가는 날입니다. 이들은 40여 년을 교단에서 보낸 교육자들로서 삶의 내공 또한 묵직한 분들입니다. 이날 함께 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희(古稀)를 넘겼으며, 80대의 회원들도 열 분이나 되었습니다. 60대인 나도 한 자리 끼기는 했지만, 이 모임에서는 내세우기조차 쑥스러운 나이입니다. 내 또래들이 선배님들의 나들이에 도우미를 자청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한 해에 두 차례씩 문화탐방이라는 이름의 나들이를 합니다. 그런데 이 나들이에는 특별한 문화가 있습니다. 비교적 젊은 후배들이 몸이 불편한 원로 선배님들의 이동을 도와주는 일이 전통입니다. 작년에는 걷지 못하는 선배님 한 분을 위해 휠체어까지 동원한 후배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날 나들이에 특별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팔순 중반의 두 선배님입니다. 그중 한 분은 몸이 불편하여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친구나 후배와 자리를 함께하면 좋을 성싶어 특별히 모신 분들이었습니다. 지난밤에도 이번 나들이에 꼭 참가해달라는 부탁을 드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발치에서 몸이 불편한 그 선배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이 다소 힘겨워 보였지만, 미리 와있던 친구가 재빨리 다가가 부축해주었습니다. 두 분이 보여준 우정의 몸짓으로 출발 전부터 모임에는 온기가 감돌았습니다.
나는 두 분 친구가 동반 나들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한 분은 호랑이 선생님으로 다른 한 분은 독일병정으로 꽤 소문이 자자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한 가락 했다고나 할까요. 요즘도 그들의 모습에서는 예전의 기개가 언뜻언뜻 보일 때가 있습니다. 특히 독일병정이라고 불렸던 선배님은 지금도 걸음걸이가 반듯하며 나이에 비해 건강하십니다. 최근에는 그중 한 분이 보행이 불편하여 서로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지만, 한때 두 분의 우정은 남달랐다고 합니다.
노년의 두 친구는 버스 안에서도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들은 간식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너무 편안하고 정겨워 샘이 날 정도였습니다. 남원 광한루 경내를 돌아볼 때도 서로 부축하고 의지하며 잠시도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간간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먼 산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지난 시절을 반추하며 과거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부축하랴 구경하랴 두 분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그림자가 그들 뒤를 따라다녔지만, 노년의 우정은 은빛이 되어 산책길을 감돌았습니다. 나는 두 선배님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우정에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도우미 역할을 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두 분이 다정하시네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단호한 대답에 나는 그대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두 분의 견고한 우정에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어젯밤엔 전화까지 해주어서 고맙네. 이 친구 설득하느라 힘 좀 들었지.”
이 말끝에 이날 나들이에 참여하기까지의 일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시종일관 옆에 붙어서 시중을 들어줄 테니 동행하자고 사정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라 했습니다. 친구가 불편한 걸음걸이 때문에 몹시 망설였던 모양입니다. 후배들이 신경 써주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일행들에게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한 것이지요. 두 분의 깊은 우정과 속 깊은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미안한 생각에 얼굴까지 화끈거렸습니다.
나들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기까지 두 분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아마 나이 탓과 세상 탓도 했겠지요. 내가 나이가 들어 저 입장에 서면 어떻게 할까. 젊은이들의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끼리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라며 중얼거려보지만 도통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두 분의 동행이 단순한 일일 수도 있을 터인데, 왜 그리 연연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내가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날 두 선배님의 모습이 여운으로 남아 내 마음속에 아주 들어앉았나 봅니다. 꽤 오래 머물 듯합니다.
노노케어(老老care)라 했던가. 현역에선 은퇴했지만 건강한 노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인을 돌보는 사업이 노인복지대책의 새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날은 구태여 대책이나 사업을 들먹일 것도 없었습니다. 나들이 길에서의 두 분 모습이 바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의 실천이며 증거였습니다.
이만큼 살기 좋아진 세상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노인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온몸을 던져 이룩해놓은 세상에 대한 자부심일까. 외로움으로 내몰리는 섭섭함일까. 어느 경우든 노년은 누구에게나 약속된 시점입니다. 그 시점에 이르면 나는 소소한 일상에서 느긋한 마음의 여유를 즐기고 싶습니다.
(2013.11.1.)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문경근
가을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날 아침, 연륜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생을 교직에 종사하다 은퇴한 선생님들이 가을나들이를 가는 날입니다. 이들은 40여 년을 교단에서 보낸 교육자들로서 삶의 내공 또한 묵직한 분들입니다. 이날 함께 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희(古稀)를 넘겼으며, 80대의 회원들도 열 분이나 되었습니다. 60대인 나도 한 자리 끼기는 했지만, 이 모임에서는 내세우기조차 쑥스러운 나이입니다. 내 또래들이 선배님들의 나들이에 도우미를 자청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한 해에 두 차례씩 문화탐방이라는 이름의 나들이를 합니다. 그런데 이 나들이에는 특별한 문화가 있습니다. 비교적 젊은 후배들이 몸이 불편한 원로 선배님들의 이동을 도와주는 일이 전통입니다. 작년에는 걷지 못하는 선배님 한 분을 위해 휠체어까지 동원한 후배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날 나들이에 특별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팔순 중반의 두 선배님입니다. 그중 한 분은 몸이 불편하여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친구나 후배와 자리를 함께하면 좋을 성싶어 특별히 모신 분들이었습니다. 지난밤에도 이번 나들이에 꼭 참가해달라는 부탁을 드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발치에서 몸이 불편한 그 선배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이 다소 힘겨워 보였지만, 미리 와있던 친구가 재빨리 다가가 부축해주었습니다. 두 분이 보여준 우정의 몸짓으로 출발 전부터 모임에는 온기가 감돌았습니다.
나는 두 분 친구가 동반 나들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한 분은 호랑이 선생님으로 다른 한 분은 독일병정으로 꽤 소문이 자자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한 가락 했다고나 할까요. 요즘도 그들의 모습에서는 예전의 기개가 언뜻언뜻 보일 때가 있습니다. 특히 독일병정이라고 불렸던 선배님은 지금도 걸음걸이가 반듯하며 나이에 비해 건강하십니다. 최근에는 그중 한 분이 보행이 불편하여 서로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지만, 한때 두 분의 우정은 남달랐다고 합니다.
노년의 두 친구는 버스 안에서도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들은 간식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너무 편안하고 정겨워 샘이 날 정도였습니다. 남원 광한루 경내를 돌아볼 때도 서로 부축하고 의지하며 잠시도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간간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먼 산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지난 시절을 반추하며 과거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부축하랴 구경하랴 두 분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그림자가 그들 뒤를 따라다녔지만, 노년의 우정은 은빛이 되어 산책길을 감돌았습니다. 나는 두 선배님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우정에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나는 도우미 역할을 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두 분이 다정하시네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단호한 대답에 나는 그대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두 분의 견고한 우정에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어젯밤엔 전화까지 해주어서 고맙네. 이 친구 설득하느라 힘 좀 들었지.”
이 말끝에 이날 나들이에 참여하기까지의 일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시종일관 옆에 붙어서 시중을 들어줄 테니 동행하자고 사정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라 했습니다. 친구가 불편한 걸음걸이 때문에 몹시 망설였던 모양입니다. 후배들이 신경 써주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일행들에게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한 것이지요. 두 분의 깊은 우정과 속 깊은 배려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미안한 생각에 얼굴까지 화끈거렸습니다.
나들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기까지 두 분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아마 나이 탓과 세상 탓도 했겠지요. 내가 나이가 들어 저 입장에 서면 어떻게 할까. 젊은이들의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끼리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라며 중얼거려보지만 도통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두 분의 동행이 단순한 일일 수도 있을 터인데, 왜 그리 연연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내가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날 두 선배님의 모습이 여운으로 남아 내 마음속에 아주 들어앉았나 봅니다. 꽤 오래 머물 듯합니다.
노노케어(老老care)라 했던가. 현역에선 은퇴했지만 건강한 노인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인을 돌보는 사업이 노인복지대책의 새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날은 구태여 대책이나 사업을 들먹일 것도 없었습니다. 나들이 길에서의 두 분 모습이 바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의 실천이며 증거였습니다.
이만큼 살기 좋아진 세상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노인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온몸을 던져 이룩해놓은 세상에 대한 자부심일까. 외로움으로 내몰리는 섭섭함일까. 어느 경우든 노년은 누구에게나 약속된 시점입니다. 그 시점에 이르면 나는 소소한 일상에서 느긋한 마음의 여유를 즐기고 싶습니다.
(201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