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미국 샌디에고/김학
2014.01.22 12:53
여기는 미국 샌디에고
-미국여행기④-
김 학
공교롭게도 나는 겨울에만 미국을 찾는다. 두 번 다 그랬다. 이번에도 12월 19일 미국으로 출국하여 3주일 동안 샌디에고에 머물렀으니 계절로는 깊은 겨울이었다.
미국 서부 샌디에고는 겨울이지만 기온이 섭씨 20도 안팎이어서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바닷가에 가보니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활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는 눈을 구경할 수도 없고, 가끔 비가 내리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고향친구를 만나러 필라델피아에 가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눈 구경도 못하고 추위도 맛보지 못할 뻔했다.
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하기 전 스마트폰 차단을 신청했었다. 그런 조치를 하지 않고 미국에 가서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전화를 받거나 문자 메시지를 마구 열어보면 귀국하여 엄청난 전화요금을 물어야 한다기에 그런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카카오톡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카카오톡 ‘3남매 사랑방’에 수시로 나의 근황을 올렸다. ‘방금 비행기 인천공항 이륙’, ‘나리타공항 도착’, ‘태평양 상공 비행 중’, ‘지금 기내식 배식 중’, ‘샌디에고공항 랜딩 중’ 이런 간단한 정보를 수시로 띄웠다. 한국에 있는 큰아들과 딸 그리고 미국에 사는 작은아들이 수시로 점검하여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고 수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카카오톡은 참 편리한 기기였다. 더구나 무료이니 얼마나 좋은가?
나는 둘째아들 집에서도 수시로 친지들에게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처음 듣는 벨소리였다. 무심결에 받아보니 할머니 수필가 정원정 선생의 목소리였다.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아들과 며느리는 전화요금이 올라간다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화요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지난해 날마다 새벽에 기도를 했었다. 문하생 중에서 꼭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오도록 해달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그 기도가 결실을 거뒀다는데 그까짓 전화요금이 대수인가? 더 놀라운 것은 80대 후반의 할머니가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것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신춘문예 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정원정 할머니의 신춘문예 당선은 문하생으로서는 네 번째 경사다. 김재희 수필가가 전북일보에서, 이주리 수필가가 경남신문에서, 이은재 수필가가 동양일보에서 당선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이번 미국여행은 휴가다. 어린 손자손녀들과 놀며 조손친교(祖孫親交)를 하러 미국을 찾은 것이다. 손자손녀들은 내 무릎에 앉거나, 어깨를 기어오르는 등 귀찮게 굴었다. 그러나 결코 싫지가 않았다. 서울에 사는 친손자 남매나 외손자 형제들은 이렇게까지는 한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손자손녀들이어서 더 친근감이 느껴졌을까?
문하생들의 수필이 메일로 배달되었다. 미국에 온 줄 알면서도 첨삭지도를 부탁한 것이다. 작은아들이 노트북을 설치해 주었지만 키보드엔 한글 표기가 없어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아들이 한글표기가 된 키보드를 그려 주었다. 나는 그것을 참고로 하여 더듬더듬 첨삭작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작업을 하지 않고 귀국하면 엄청난 일거리가 쌓이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일이니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내가 컴퓨터에 매달리자 작은아들은 미국까지 오셔서 컴퓨터에 매달리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손자손녀들과 더 추억을 쌓고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아들 눈치를 보아 가면서 깊은 밤에 첨삭작업을 하여 메일로 보내주었다. 그랬더니 어떤 수강생은 벌써 귀국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는 미국 샌디에고’라고 덧붙여주었다. 첨삭작품이 한 편 두 편 배달되자 미국에서도 첨삭지도가 가능하구나 싶었는지 작품이 계속 들어왔다. 나는 휴가 중에 머나먼 미국에서도 꾸준히 첨삭지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수필지도 13년 만에 ‘미국에서의 첨삭지도’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아들은 나에게 컴퓨터중독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수필지도를 하면서부터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나는 게임에 빠지거나 야한 동영상을 감상하느라 컴퓨터에 시간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니 오히려 떳떳할 뿐이다. 컴퓨터는 내가 수필을 지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인 걸 어쩌겠는가?
(2014. 1. 23.)
-미국여행기④-
김 학
공교롭게도 나는 겨울에만 미국을 찾는다. 두 번 다 그랬다. 이번에도 12월 19일 미국으로 출국하여 3주일 동안 샌디에고에 머물렀으니 계절로는 깊은 겨울이었다.
미국 서부 샌디에고는 겨울이지만 기온이 섭씨 20도 안팎이어서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바닷가에 가보니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활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는 눈을 구경할 수도 없고, 가끔 비가 내리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고향친구를 만나러 필라델피아에 가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눈 구경도 못하고 추위도 맛보지 못할 뻔했다.
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하기 전 스마트폰 차단을 신청했었다. 그런 조치를 하지 않고 미국에 가서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전화를 받거나 문자 메시지를 마구 열어보면 귀국하여 엄청난 전화요금을 물어야 한다기에 그런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카카오톡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카카오톡 ‘3남매 사랑방’에 수시로 나의 근황을 올렸다. ‘방금 비행기 인천공항 이륙’, ‘나리타공항 도착’, ‘태평양 상공 비행 중’, ‘지금 기내식 배식 중’, ‘샌디에고공항 랜딩 중’ 이런 간단한 정보를 수시로 띄웠다. 한국에 있는 큰아들과 딸 그리고 미국에 사는 작은아들이 수시로 점검하여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고 수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카카오톡은 참 편리한 기기였다. 더구나 무료이니 얼마나 좋은가?
나는 둘째아들 집에서도 수시로 친지들에게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처음 듣는 벨소리였다. 무심결에 받아보니 할머니 수필가 정원정 선생의 목소리였다.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아들과 며느리는 전화요금이 올라간다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화요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지난해 날마다 새벽에 기도를 했었다. 문하생 중에서 꼭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오도록 해달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그 기도가 결실을 거뒀다는데 그까짓 전화요금이 대수인가? 더 놀라운 것은 80대 후반의 할머니가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것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신춘문예 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정원정 할머니의 신춘문예 당선은 문하생으로서는 네 번째 경사다. 김재희 수필가가 전북일보에서, 이주리 수필가가 경남신문에서, 이은재 수필가가 동양일보에서 당선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이번 미국여행은 휴가다. 어린 손자손녀들과 놀며 조손친교(祖孫親交)를 하러 미국을 찾은 것이다. 손자손녀들은 내 무릎에 앉거나, 어깨를 기어오르는 등 귀찮게 굴었다. 그러나 결코 싫지가 않았다. 서울에 사는 친손자 남매나 외손자 형제들은 이렇게까지는 한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손자손녀들이어서 더 친근감이 느껴졌을까?
문하생들의 수필이 메일로 배달되었다. 미국에 온 줄 알면서도 첨삭지도를 부탁한 것이다. 작은아들이 노트북을 설치해 주었지만 키보드엔 한글 표기가 없어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아들이 한글표기가 된 키보드를 그려 주었다. 나는 그것을 참고로 하여 더듬더듬 첨삭작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작업을 하지 않고 귀국하면 엄청난 일거리가 쌓이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할 일이니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내가 컴퓨터에 매달리자 작은아들은 미국까지 오셔서 컴퓨터에 매달리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손자손녀들과 더 추억을 쌓고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아들 눈치를 보아 가면서 깊은 밤에 첨삭작업을 하여 메일로 보내주었다. 그랬더니 어떤 수강생은 벌써 귀국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는 미국 샌디에고’라고 덧붙여주었다. 첨삭작품이 한 편 두 편 배달되자 미국에서도 첨삭지도가 가능하구나 싶었는지 작품이 계속 들어왔다. 나는 휴가 중에 머나먼 미국에서도 꾸준히 첨삭지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수필지도 13년 만에 ‘미국에서의 첨삭지도’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아들은 나에게 컴퓨터중독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수필지도를 하면서부터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나는 게임에 빠지거나 야한 동영상을 감상하느라 컴퓨터에 시간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니 오히려 떳떳할 뿐이다. 컴퓨터는 내가 수필을 지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인 걸 어쩌겠는가?
(2014.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