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테크/김규원
2014.05.25 08:29
정(情) 테크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규 원
‘정’이라는 개념을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게 쓰고 느끼는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 아닐까 싶다. 정(情)을 한글사전에 찾아보면 ㉠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하여 느끼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 =감정(感情). ㉡ 사귐이 깊어감에 따라 더해가는 친근한 마음. ㉢ 남을 염려하여 헤아리는 마음. ㉣ 남녀 간의 애정 ㉤ 심리학에서, 마음을 이루는 두 요소 가운데의 한 가지, 곧 이지적인 요소에 더하여 감동적인 요소를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이 정의 개념들을 세분하여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정’이라는 말 하나로 사전에 열거한 내용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정’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근원이고, 모든 관계에 얽혀있는 끈이다. 정이 들면 들수록 가까워져 너와 내가 없어져 하나가 된다. 정든 사람, 정든 사물에 마음을 떨치지 못해 번민하고 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우리다. 정은 셀 수 있는 단위가 없고, 담아낼 부피가 없는 무형의 것이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하거나,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을 드러낸다. 유행가 가사가 말하듯이 ‘정에 웃고, 정에 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다. 정해(情海)에 빠져 헤어나지 못해 자신의 진로나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정이 없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정으로 연결되지 않은 관계는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정은 혈연의 정이거나, 가까이서 자주 접하면서 드는 정이다. 정출어근(情出於近)이라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어야 정이 생겨 두터워지고, 정이 드는 법이다. 정이 생겨 점차 두터워지는 일을 ‘정든다.’고 표현한다. 정은 마음 안으로 들어가 쌓이는 ‘무엇’이다. 그 무엇은 사랑 · 염려 · 좋음 · 느낌 · 끌림 등의 마음움직임이라고 해두자. 흐르듯 지나치는 정은 마음에 들어서지 않고 가기 때문에 두터워질 수 없어서 들지 않는 정이다. 정이라는 커다란 명제는 내 수준의 소양으로 감히 말할 수 없음을 나는 느낀다. 그저 우연히 ‘정(情) 테크’ 라는 말을 보고 너무 멋진 그 어휘에 맘이 끌려 짧은 생각으로 긴 글을 적어보고 있다.
‘최고의 노후대책은 정 테크’라는 어느 잡지 기사를 보았다. 황혼이혼이 급증하는 현실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노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다독이는 일이라는 기사였다. 재테크의 개념처럼 정을 두텁게 축적해두는 정 테크가 여생을 행복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생활이 편하고, 웬만한 질병은 치료가 가능해졌다. 60대나 70대의 나이는 죽음을 생각하는 생의 끝자락이 아닌, 앞으로 20~30년을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지난날처럼 손자들의 재롱을 그리워하며, 무기력하게 살다가 병을 얻어 죽는 무의미한 삶을 거부하는, 노인의식의 변화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장의 권위에 눌려 살던 부인들, 자식들 때문에 남편에 대한 불만을 누르고 살던 부인들, 소수이지만 부인들의 서슬에 숨죽여 살던 남편들이, 남은 인생에서는 자기 자신을 찾고 보람과 행복을 구하는 변화를 원하고 있다고 그 기사는 지적하고 있었다.
정이 깊은 부부들은 남은 생을 사랑하는 배우자와 가장 아름답고 즐겁게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쌓아둔 정이라는 뜨거운 국물을 나누어 불어마시며, 서로를 감싸고 보듬어 더욱 사랑하고 오순도순 행복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정 테크’의 위력이다. 부부의 정을 쌓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상대를 배려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베푸는 마음이 아니라 받드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과 존중으로 서로를 배려하면서 사랑은 커갈 수 있다. 지난 시절, 돈을 벌어오는 가장의 위세와 권위로 가정에 군림하던 시절은 이제 추억일 뿐이다. 노인이 된 지금이라도, 남편은 부인에게 작은 배려와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을 항상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정 테크는 부부간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식들에게도 항시 말뿐인 것이라도 좋게 대하고 사랑을 표하는 가운데 정이 쌓인다. 자녀들과 손자의 전화를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걸어서 관심을 보이고 정을 두텁게 해야 한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내가 관심을 보이고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정을 쌓는 것이 외롭지 않게 사는 방법이다. 이러한 개념은 가족, 친척, 친지, 친구, 이웃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이다. 서로 대화의 기회를 늘리고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쓰면, 그것들이 정으로 쌓인다. 이것이 정 테크다. 정이 쌓이면 내 주변이 훈훈해지고 가슴 속의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희미한 그림자로 변한다.
나는 정 테크에 실패했다. 아내가 불치병으로 요양병원에 맡겨진 뒤, 컴퓨터 속에서 가상의 삶을 살며 외로움을 견뎌왔다. 세상과 단절한 채, 정을 잊고 살았다. 비쌔는 성미에 누구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달리고, 산을 오르고, 자전거를 탔지만 마음은 날로 피폐해졌다. 십여 년 만에 다행히도 노인복지관에서 친구들을 만나 말을 섞으며, 정을 조금씩 살려내고, 수필을 알면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 열린 마음사이로 세상의 정을 한 겹, 두 겹 들여, 쌓아갈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있다. 그렇게 쌓은 정이 내 여생에서 작은 빛으로 드러날 수 있으면 좋겠다.
*비쌔다: 마음은 있으면서 겉으로 사양하는 체하다. 무슨 일에나 어울리기를 싫어하다.
(2014.05.25.)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규 원
‘정’이라는 개념을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게 쓰고 느끼는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 아닐까 싶다. 정(情)을 한글사전에 찾아보면 ㉠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하여 느끼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 =감정(感情). ㉡ 사귐이 깊어감에 따라 더해가는 친근한 마음. ㉢ 남을 염려하여 헤아리는 마음. ㉣ 남녀 간의 애정 ㉤ 심리학에서, 마음을 이루는 두 요소 가운데의 한 가지, 곧 이지적인 요소에 더하여 감동적인 요소를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이 정의 개념들을 세분하여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정’이라는 말 하나로 사전에 열거한 내용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정’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근원이고, 모든 관계에 얽혀있는 끈이다. 정이 들면 들수록 가까워져 너와 내가 없어져 하나가 된다. 정든 사람, 정든 사물에 마음을 떨치지 못해 번민하고 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우리다. 정은 셀 수 있는 단위가 없고, 담아낼 부피가 없는 무형의 것이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하거나,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을 드러낸다. 유행가 가사가 말하듯이 ‘정에 웃고, 정에 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다. 정해(情海)에 빠져 헤어나지 못해 자신의 진로나 삶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정이 없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정으로 연결되지 않은 관계는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정은 혈연의 정이거나, 가까이서 자주 접하면서 드는 정이다. 정출어근(情出於近)이라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어야 정이 생겨 두터워지고, 정이 드는 법이다. 정이 생겨 점차 두터워지는 일을 ‘정든다.’고 표현한다. 정은 마음 안으로 들어가 쌓이는 ‘무엇’이다. 그 무엇은 사랑 · 염려 · 좋음 · 느낌 · 끌림 등의 마음움직임이라고 해두자. 흐르듯 지나치는 정은 마음에 들어서지 않고 가기 때문에 두터워질 수 없어서 들지 않는 정이다. 정이라는 커다란 명제는 내 수준의 소양으로 감히 말할 수 없음을 나는 느낀다. 그저 우연히 ‘정(情) 테크’ 라는 말을 보고 너무 멋진 그 어휘에 맘이 끌려 짧은 생각으로 긴 글을 적어보고 있다.
‘최고의 노후대책은 정 테크’라는 어느 잡지 기사를 보았다. 황혼이혼이 급증하는 현실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노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다독이는 일이라는 기사였다. 재테크의 개념처럼 정을 두텁게 축적해두는 정 테크가 여생을 행복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생활이 편하고, 웬만한 질병은 치료가 가능해졌다. 60대나 70대의 나이는 죽음을 생각하는 생의 끝자락이 아닌, 앞으로 20~30년을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지난날처럼 손자들의 재롱을 그리워하며, 무기력하게 살다가 병을 얻어 죽는 무의미한 삶을 거부하는, 노인의식의 변화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장의 권위에 눌려 살던 부인들, 자식들 때문에 남편에 대한 불만을 누르고 살던 부인들, 소수이지만 부인들의 서슬에 숨죽여 살던 남편들이, 남은 인생에서는 자기 자신을 찾고 보람과 행복을 구하는 변화를 원하고 있다고 그 기사는 지적하고 있었다.
정이 깊은 부부들은 남은 생을 사랑하는 배우자와 가장 아름답고 즐겁게 살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쌓아둔 정이라는 뜨거운 국물을 나누어 불어마시며, 서로를 감싸고 보듬어 더욱 사랑하고 오순도순 행복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정 테크’의 위력이다. 부부의 정을 쌓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상대를 배려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베푸는 마음이 아니라 받드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과 존중으로 서로를 배려하면서 사랑은 커갈 수 있다. 지난 시절, 돈을 벌어오는 가장의 위세와 권위로 가정에 군림하던 시절은 이제 추억일 뿐이다. 노인이 된 지금이라도, 남편은 부인에게 작은 배려와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을 항상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정 테크는 부부간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자식들에게도 항시 말뿐인 것이라도 좋게 대하고 사랑을 표하는 가운데 정이 쌓인다. 자녀들과 손자의 전화를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걸어서 관심을 보이고 정을 두텁게 해야 한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내가 관심을 보이고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정을 쌓는 것이 외롭지 않게 사는 방법이다. 이러한 개념은 가족, 친척, 친지, 친구, 이웃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이다. 서로 대화의 기회를 늘리고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쓰면, 그것들이 정으로 쌓인다. 이것이 정 테크다. 정이 쌓이면 내 주변이 훈훈해지고 가슴 속의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희미한 그림자로 변한다.
나는 정 테크에 실패했다. 아내가 불치병으로 요양병원에 맡겨진 뒤, 컴퓨터 속에서 가상의 삶을 살며 외로움을 견뎌왔다. 세상과 단절한 채, 정을 잊고 살았다. 비쌔는 성미에 누구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달리고, 산을 오르고, 자전거를 탔지만 마음은 날로 피폐해졌다. 십여 년 만에 다행히도 노인복지관에서 친구들을 만나 말을 섞으며, 정을 조금씩 살려내고, 수필을 알면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 열린 마음사이로 세상의 정을 한 겹, 두 겹 들여, 쌓아갈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있다. 그렇게 쌓은 정이 내 여생에서 작은 빛으로 드러날 수 있으면 좋겠다.
*비쌔다: 마음은 있으면서 겉으로 사양하는 체하다. 무슨 일에나 어울리기를 싫어하다.
(2014.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