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친구들/문애선
2014.05.26 06:50
주유소 친구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문애선
우리는 수많은 이름의 모임과 단체에 참가하여 서로 지속적으로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무슨 모임을 만들거나 혹은 자생적으로 모임이 만들어질 때는 모임의 목적이나 성격, 특징에 맞는 이름을 짓게 마련이다. 학교동창회라거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아니면 취미활동을 하는 동호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주유소 친구라니? 현직에 있을 때 승진을 하게 되어 임지로 가니, 동료나 선후배들이 축하화분을 많이 보내주었다. 그중 한 리본에 ‘승진을 축하합니다. 주유소 일동’이란 리본을 보고 누군가 물었다. “주유소 하시는 분들과 친구이세요? 아니면 주유소에서 주유하다가 만난 분들이세요?” 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주유소란 술 주(酒), 있을 유(有), 바 소(所) 즉 ‘술이 있는 곳’이란 뜻의 친구들이라고 알려주었다.
1994년 그때 당시 나는 정읍여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 인근 입암중학교에는 나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 H가 전주에서 카풀을 하면서 S와 친하게 지냈다. 정읍여중에는 입암중학교 S의 초등학교 동창인 Y가 있었기에 자연스레 4명이서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로 상대방을 배려해주려는 마음도 따뜻하고, 내 것 네 것 그렇게 잘 따지지 않는 것도, 생각하는 속 깊은 정도 잘 통했다. 대개 여자들의 모임이라면 같이 식사하고 차나 한 잔 하고는 헤어지는 것이 거의 통례다. 그러나 우리는 모이면 서로 술을 한 잔씩 할 수 있다 보니, 밥 먹으며 하는 이야기가 다르고 술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가 다른 모양이었다. 학교 이야기,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거기에 더하여 남편들까지 자연스레 합세하여 모임이 오래토록 유지되고 그렇게 하여 주유소(酒有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1년에 한 번쯤은 멀리 나들이를 함께 하기도 하며 수시로 산에 오르기, 마을 둘레길 걷기를 하기도 했다.
명절날, 특히 추석날 저녁이면 전주천변으로 각자 집에서 걸어와 약속장소에 모이기도 하였다. 집에서 만들어놓은 간단한 안주거리와 술도 한 병씩 가지고 모여 보름달 이야기와 명절을 보내면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보름날 밤 초저녁에 모여 달빛을 등지고 모악산 등반을 하여 정상에 올라 준비해 온 막걸리를 마신 적도 있었다.
“이번 금요일 오후 5시 반, 수만리에서 주유소 번개팅이 있습니다.”
휴대폰 카톡 알림으로 온 메시지다. 우리 집에서 내가 챙겨야 할 것은 거의 변함이 없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고정적으로 집에서 담근 매실주, 김장김치다. 일종의 *포트럭 파티인 셈이다. 찌개용 고기를, 야채와 양념류 일체, 과일 등 이렇게 준비해서 일정을 감안하여 양을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도 각자 집에서 먹을 만한 밑반찬이 있으면 한두 가지를 더 곁들여서 가져온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넉넉히 가져오기에 항상 충분히 잘 먹기도 하지만 또 남으면 필요한 친구가 가져가기도 한다.
이번 모임은 주유소 친구 중 수만리에 있는 Y의 별장식 시골집에서 열렸다. 수만리에 도착해보니 Y는 머윗대를 꺾으러 먼저 뒷밭으로 갔고, H와 나는 들깨 모종을 솎아내야 했다. 양은솥에는 물을 붓고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방도 따뜻하게 해야 하고 또 친구가 가져올 머윗대를 삶아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불을 때보는데 자신이 없었다. 폐지를 쏘시개 삼아 태우다가 나뭇가지를 살짝 얹으니 다행히 꺼지지 않고 불이 잘 붙었다.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전골과 갓 씻은 상추, 쑥갓, 들깨 잎을 넣은 겉절이에 매실주로 목을 축이며 때마침 들리는 소쩍새 소리도 안주로는 그만이었다. 저녁 후에는 한 소쿠리나 되는 삶은 머윗대를 넷이 둘러앉아 껍질을 벗겼다. 며칠 전에 내려온 누구네 사위 맞이한 이야기며, 7월에 있을 알래스카 여행이야기로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벗겨낸 머윗대 껍질은 수북이 쌓여갔다. 다음날, 우리 주유소 친구들의 식탁엔 모두 어김없이 머위들깨 탕이 올라왔다. 엊그제 만난 것 같은데 올해로 꼭 20년째다.
법정 스님은 ‘친구란 내 울림에 대한 응답의 메아리다.’라고 했고,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라고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정의했다.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의 차이를 이야기할 적에도 친구이야기가 나온다. 흡연, 음주, 일하는 스타일, 사회적인 지위, 경제 상황, 인간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미국인 7천명을 대상으로 9년간 추적조사를 했다. 담배나 술은 수명과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장수하는 사람들의 단 하나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친구의 수’였다고 한다. 즉 친구의 수가 적을수록 쉽게 병에 걸리고 일찍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친구들이 많고 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스트레스가 줄며 더 건강한 삶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서양속담에 술과 친구는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묵은 친구들과 술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을 일일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일생의 1/3을 함께 해오다시피한 주유소 친구들이 있어서 내 인생이 더욱 향기롭고 친구 덕에 장수할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4-5년 더 기다려 모두 퇴직한 뒤에는 적당한 장소에 집을 짓고 무리지어 함께 살아갈 방법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작은 텃밭도 함께 가꾸어 건강한 먹거리도 만들어먹고, 소박한 카페도 꾸미며, 친구들과 함께 한 추억도 가끔 되새기며 서로의 은빛 머리를 바라봐줄 일이다.
햇빛 좋고 바람 선선한 날이면 친구들과 함께 칼국수도 만들어 먹으며 솜씨 자랑을 해보는 것도 기대되는 덕목이다. 함께 손잡고 같은 곳을 걸어갈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따서 보내고 싶은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2014. 5. 26.)
*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 파티 주최자가 간단한 메인 메뉴만 준비하고 참석자들이 각자 취향에 맞는 메뉴나 와인 등을 갖고 오는 미국과 캐나다 식 파티 문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문애선
우리는 수많은 이름의 모임과 단체에 참가하여 서로 지속적으로 만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무슨 모임을 만들거나 혹은 자생적으로 모임이 만들어질 때는 모임의 목적이나 성격, 특징에 맞는 이름을 짓게 마련이다. 학교동창회라거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아니면 취미활동을 하는 동호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주유소 친구라니? 현직에 있을 때 승진을 하게 되어 임지로 가니, 동료나 선후배들이 축하화분을 많이 보내주었다. 그중 한 리본에 ‘승진을 축하합니다. 주유소 일동’이란 리본을 보고 누군가 물었다. “주유소 하시는 분들과 친구이세요? 아니면 주유소에서 주유하다가 만난 분들이세요?” 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주유소란 술 주(酒), 있을 유(有), 바 소(所) 즉 ‘술이 있는 곳’이란 뜻의 친구들이라고 알려주었다.
1994년 그때 당시 나는 정읍여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 인근 입암중학교에는 나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 H가 전주에서 카풀을 하면서 S와 친하게 지냈다. 정읍여중에는 입암중학교 S의 초등학교 동창인 Y가 있었기에 자연스레 4명이서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로 상대방을 배려해주려는 마음도 따뜻하고, 내 것 네 것 그렇게 잘 따지지 않는 것도, 생각하는 속 깊은 정도 잘 통했다. 대개 여자들의 모임이라면 같이 식사하고 차나 한 잔 하고는 헤어지는 것이 거의 통례다. 그러나 우리는 모이면 서로 술을 한 잔씩 할 수 있다 보니, 밥 먹으며 하는 이야기가 다르고 술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가 다른 모양이었다. 학교 이야기,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까지. 거기에 더하여 남편들까지 자연스레 합세하여 모임이 오래토록 유지되고 그렇게 하여 주유소(酒有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1년에 한 번쯤은 멀리 나들이를 함께 하기도 하며 수시로 산에 오르기, 마을 둘레길 걷기를 하기도 했다.
명절날, 특히 추석날 저녁이면 전주천변으로 각자 집에서 걸어와 약속장소에 모이기도 하였다. 집에서 만들어놓은 간단한 안주거리와 술도 한 병씩 가지고 모여 보름달 이야기와 명절을 보내면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보름날 밤 초저녁에 모여 달빛을 등지고 모악산 등반을 하여 정상에 올라 준비해 온 막걸리를 마신 적도 있었다.
“이번 금요일 오후 5시 반, 수만리에서 주유소 번개팅이 있습니다.”
휴대폰 카톡 알림으로 온 메시지다. 우리 집에서 내가 챙겨야 할 것은 거의 변함이 없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고정적으로 집에서 담근 매실주, 김장김치다. 일종의 *포트럭 파티인 셈이다. 찌개용 고기를, 야채와 양념류 일체, 과일 등 이렇게 준비해서 일정을 감안하여 양을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도 각자 집에서 먹을 만한 밑반찬이 있으면 한두 가지를 더 곁들여서 가져온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넉넉히 가져오기에 항상 충분히 잘 먹기도 하지만 또 남으면 필요한 친구가 가져가기도 한다.
이번 모임은 주유소 친구 중 수만리에 있는 Y의 별장식 시골집에서 열렸다. 수만리에 도착해보니 Y는 머윗대를 꺾으러 먼저 뒷밭으로 갔고, H와 나는 들깨 모종을 솎아내야 했다. 양은솥에는 물을 붓고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방도 따뜻하게 해야 하고 또 친구가 가져올 머윗대를 삶아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불을 때보는데 자신이 없었다. 폐지를 쏘시개 삼아 태우다가 나뭇가지를 살짝 얹으니 다행히 꺼지지 않고 불이 잘 붙었다.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전골과 갓 씻은 상추, 쑥갓, 들깨 잎을 넣은 겉절이에 매실주로 목을 축이며 때마침 들리는 소쩍새 소리도 안주로는 그만이었다. 저녁 후에는 한 소쿠리나 되는 삶은 머윗대를 넷이 둘러앉아 껍질을 벗겼다. 며칠 전에 내려온 누구네 사위 맞이한 이야기며, 7월에 있을 알래스카 여행이야기로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벗겨낸 머윗대 껍질은 수북이 쌓여갔다. 다음날, 우리 주유소 친구들의 식탁엔 모두 어김없이 머위들깨 탕이 올라왔다. 엊그제 만난 것 같은데 올해로 꼭 20년째다.
법정 스님은 ‘친구란 내 울림에 대한 응답의 메아리다.’라고 했고,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라고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정의했다.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의 차이를 이야기할 적에도 친구이야기가 나온다. 흡연, 음주, 일하는 스타일, 사회적인 지위, 경제 상황, 인간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미국인 7천명을 대상으로 9년간 추적조사를 했다. 담배나 술은 수명과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장수하는 사람들의 단 하나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친구의 수’였다고 한다. 즉 친구의 수가 적을수록 쉽게 병에 걸리고 일찍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친구들이 많고 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스트레스가 줄며 더 건강한 삶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서양속담에 술과 친구는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묵은 친구들과 술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을 일일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일생의 1/3을 함께 해오다시피한 주유소 친구들이 있어서 내 인생이 더욱 향기롭고 친구 덕에 장수할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4-5년 더 기다려 모두 퇴직한 뒤에는 적당한 장소에 집을 짓고 무리지어 함께 살아갈 방법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작은 텃밭도 함께 가꾸어 건강한 먹거리도 만들어먹고, 소박한 카페도 꾸미며, 친구들과 함께 한 추억도 가끔 되새기며 서로의 은빛 머리를 바라봐줄 일이다.
햇빛 좋고 바람 선선한 날이면 친구들과 함께 칼국수도 만들어 먹으며 솜씨 자랑을 해보는 것도 기대되는 덕목이다. 함께 손잡고 같은 곳을 걸어갈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따서 보내고 싶은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2014. 5. 26.)
*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 파티 주최자가 간단한 메인 메뉴만 준비하고 참석자들이 각자 취향에 맞는 메뉴나 와인 등을 갖고 오는 미국과 캐나다 식 파티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