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석정 선생님/김규원
2014.06.11 07:47
나와 석정 선생님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김 규 원
문학기행을 가서 석정문학관에서 52년 만에 석정 선생님을 뵈었다. 후리후리한 키, 멋진 웨이브 머리, 크고 높은 코, 조끼와 파이프를 애용하시던 선생님의 향기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선생님의 육신은 떠났지만 당신의 굽히지 않는 소신과 아름다운 글, 제자들을 사랑하시던 마음은 거기 당신의 문학관에 오롯이 남아 많은 말씀을 하고 계셨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삶이 있는가 하면, 선생님처럼 돌아가셨지만 우리에게 감동과 사랑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는 죽음이 있음을 실감했다. 금방 어디선가 비음이 짙게 섞인 석정 선생님의 “경례 잘하는 학생! 읽어라!” 하시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선생님과의 각별한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1년 여름방학 전 쯤, 점심을 먹고 5교시 국어수업을 기다리며 엎드려 자고 있었다. 당시에 우리학교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면 당번의 지휘로 모두 일어서서 경례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었다. 당번이 “차렷!” “경례!”하고 인사를 한 뒤,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선잠을 깨어 어리벙벙하게 앉아 있었는데, 석정 선생님이 날 가리키며 “너! 이리 나와!”하셨다. 영문을 모르고 선생님 앞으로 가니, 대뜸 출석부로 머리를 ‘퍽’하고 때리셨다.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하여 서 있는데, “너 경례 다시 해봐!”하셨다.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경례를 했다. “네가 방금 그렇게 경례를 했냐?” 그 말씀을 듣고 생각하니 구령을 듣고도 잠결에 경례를 제대로 안했었다. 평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는 석정 선생님이 노하신 걸 보니 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았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줄은 아냐? 너 몇 번이지?”
번호를 말하자 교사수첩을 꺼내 내 국어성적을 확인하시더니 “어? 국어 성적은 좋네.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하셨다.
평소 무한히 존경하던 선생님에게 실수를 하고 질책을 당한 마음은 아팠다. 교무실로 가서 사실대로 엎드려 자다가 잠이 제대로 깨지 않아 그런 실수를 했노라고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석정 선생님의 시와 수업시간의 모든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 뒤부터 석정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오시면 그날 공부할 부분을 “경례 잘하는 학생, 읽어라!”하셨고, 국어시간의 모든 일은 나만 시켰다. 시험성적도 나더러 불러주도록 했다. 교무실이나 복도에서 만나면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셨지만 수업시간에는 항상 ‘경례 잘하는 학생’이었다.
석정 선생님은 당시 교원노조 문제와 군사정부의 선전에 반하는 시를 발표하여 조사를 받는 등 불쾌한 일이 있어 신경이 날카로웠다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손을 절반도 안올리며 경례를 하니,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출석부로 머리를 때렸다고. 그리고 바로 후회를 했노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 한 번은 군사쿠데타 이후 국민들의 어려운 형편과 군사정치를 비판하는 자신의 시를 수업시간에 불러주며 내게 시의 의미를 해석해보라고 하셨던 일도 기억한다. 밀가루배급을 받기위해 길게 줄을 선 국민들의 모습을 표현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시는 남아있는 석정시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선생님께서는, 시인의 사명은 아름다운 글을 쓰는데 있지 않다고 하셨다. 현실을 외면한 글은 글이 아니라고…….
훤칠한 키에 담배 파이프를 한 손에 들고 학교 뒤 언덕을 산책하시며 깊은 사색에 잠긴 선생님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였다. 나도 나이 들어 저런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닮고 싶은 영원한 우상이었다. 특히 당시 군사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이었다. 수업시간에도 가끔은 겁나는(?) 비판을 쏟아내셨고, 몇 차례 벤치나 조용한 장소에서 뵈었을 때는 서슴없고 날선 비판을 토로하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나중에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고, 가톨릭교회에서 농민운동과 반독재 활동을 하게 된 근본이 바로 고등학교 시절 석정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론에 종사하며 몇 줄 바른 소리를 적어댈 수 있었던 바탕에도 선생님의 소리 없는 가르침이 있었음을 이제야 실감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때 내게 시를 가르쳐주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다. 나도 선생님께 다른 이야기만 하고 왜 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 외골수 성격이 시를 고민하다가 미쳐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 일부러 피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글쓰기를 배웠더라면 오늘 수필 한 편 쓰노라 이처럼 힘겨워하지 않을 것인데……. 오늘 밤 꿈에는 석정 선생님을 꼭 뵙고 글 쓰는 마음에 대해 배우고 싶다. 마음의 눈이 언제쯤 열릴지도 여쭤보고 싶다.
(2014. 06. 11.)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김 규 원
문학기행을 가서 석정문학관에서 52년 만에 석정 선생님을 뵈었다. 후리후리한 키, 멋진 웨이브 머리, 크고 높은 코, 조끼와 파이프를 애용하시던 선생님의 향기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선생님의 육신은 떠났지만 당신의 굽히지 않는 소신과 아름다운 글, 제자들을 사랑하시던 마음은 거기 당신의 문학관에 오롯이 남아 많은 말씀을 하고 계셨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삶이 있는가 하면, 선생님처럼 돌아가셨지만 우리에게 감동과 사랑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는 죽음이 있음을 실감했다. 금방 어디선가 비음이 짙게 섞인 석정 선생님의 “경례 잘하는 학생! 읽어라!” 하시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선생님과의 각별한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1년 여름방학 전 쯤, 점심을 먹고 5교시 국어수업을 기다리며 엎드려 자고 있었다. 당시에 우리학교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면 당번의 지휘로 모두 일어서서 경례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었다. 당번이 “차렷!” “경례!”하고 인사를 한 뒤,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선잠을 깨어 어리벙벙하게 앉아 있었는데, 석정 선생님이 날 가리키며 “너! 이리 나와!”하셨다. 영문을 모르고 선생님 앞으로 가니, 대뜸 출석부로 머리를 ‘퍽’하고 때리셨다.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하여 서 있는데, “너 경례 다시 해봐!”하셨다.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경례를 했다. “네가 방금 그렇게 경례를 했냐?” 그 말씀을 듣고 생각하니 구령을 듣고도 잠결에 경례를 제대로 안했었다. 평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는 석정 선생님이 노하신 걸 보니 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았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줄은 아냐? 너 몇 번이지?”
번호를 말하자 교사수첩을 꺼내 내 국어성적을 확인하시더니 “어? 국어 성적은 좋네.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하셨다.
평소 무한히 존경하던 선생님에게 실수를 하고 질책을 당한 마음은 아팠다. 교무실로 가서 사실대로 엎드려 자다가 잠이 제대로 깨지 않아 그런 실수를 했노라고 말씀드리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석정 선생님의 시와 수업시간의 모든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 뒤부터 석정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오시면 그날 공부할 부분을 “경례 잘하는 학생, 읽어라!”하셨고, 국어시간의 모든 일은 나만 시켰다. 시험성적도 나더러 불러주도록 했다. 교무실이나 복도에서 만나면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셨지만 수업시간에는 항상 ‘경례 잘하는 학생’이었다.
석정 선생님은 당시 교원노조 문제와 군사정부의 선전에 반하는 시를 발표하여 조사를 받는 등 불쾌한 일이 있어 신경이 날카로웠다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손을 절반도 안올리며 경례를 하니,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출석부로 머리를 때렸다고. 그리고 바로 후회를 했노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 한 번은 군사쿠데타 이후 국민들의 어려운 형편과 군사정치를 비판하는 자신의 시를 수업시간에 불러주며 내게 시의 의미를 해석해보라고 하셨던 일도 기억한다. 밀가루배급을 받기위해 길게 줄을 선 국민들의 모습을 표현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시는 남아있는 석정시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선생님께서는, 시인의 사명은 아름다운 글을 쓰는데 있지 않다고 하셨다. 현실을 외면한 글은 글이 아니라고…….
훤칠한 키에 담배 파이프를 한 손에 들고 학교 뒤 언덕을 산책하시며 깊은 사색에 잠긴 선생님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시였다. 나도 나이 들어 저런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닮고 싶은 영원한 우상이었다. 특히 당시 군사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이었다. 수업시간에도 가끔은 겁나는(?) 비판을 쏟아내셨고, 몇 차례 벤치나 조용한 장소에서 뵈었을 때는 서슴없고 날선 비판을 토로하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나중에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고, 가톨릭교회에서 농민운동과 반독재 활동을 하게 된 근본이 바로 고등학교 시절 석정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론에 종사하며 몇 줄 바른 소리를 적어댈 수 있었던 바탕에도 선생님의 소리 없는 가르침이 있었음을 이제야 실감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때 내게 시를 가르쳐주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다. 나도 선생님께 다른 이야기만 하고 왜 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 외골수 성격이 시를 고민하다가 미쳐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 일부러 피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글쓰기를 배웠더라면 오늘 수필 한 편 쓰노라 이처럼 힘겨워하지 않을 것인데……. 오늘 밤 꿈에는 석정 선생님을 꼭 뵙고 글 쓰는 마음에 대해 배우고 싶다. 마음의 눈이 언제쯤 열릴지도 여쭤보고 싶다.
(2014. 0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