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김효순
2014.06.30 14:23
거리두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 효 순
오늘도 새소리에 잠이 깼다. 어슴새벽이다. 바로 일어나기가 아쉬워 잠시 뭉그적거려 본다. 온갖 새들이 다 모였나 보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가지각색이다. 짹짹거리는 소리 사이로 옥구슬을 굴리듯 맑은 소리가 어우러지고, 이리저리 후드득 날아다니는 소리도 들린다.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벌써 며칠 째다. 이른 아침이면 새들이 마당 동쪽 끝에 있는 보리수나무로 모여든다. 가지가 찢어질 듯 주렁주렁 열린 보리똥이 빨갛게 익어가기 때문이다. 맛있게 차려진 아침상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새들은 신나게 보리똥을 따먹는다.
참새, 박새, 딱새…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그 새들은 물론이고 이름 모를 새들도 날아든다. 낮에는 다들 어디로 가 보이지 않다가 사람이 잠든 새벽녘에는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치고 다닌다. 가히 새들의 세상이다. 아침에 눈뜨면 바로 초록이 보이는 집에서 사는 것이 오래된 꿈의 하나였지만 이렇게 아침마다 새들의 노래까지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회색 아파트 숲에서 벗어나 이곳 봉실산자락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언 칠 년째다. 듬성듬성 심었던 마당의 잔디가 어느새 뿌리내려 새파랗고, 울타리로 심어놓은 나무들도 제법 많이 자랐다. 산수유나무, 단풍나무, 배롱나무, 이팝나무, 살구나무, 소나무, 감나무, 광나무, 목련 등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빼곡하다.
나무들이 자라면서 뜻밖의 문제들이 생겼다. 처음 묘목을 심을 때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적당히 띄어 심어야 했었다. 실 날 같이 어린 나무들이 하도 시원찮아 장차 클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너무 촘촘히 심은 것이다. 더구나 이사 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거르지 않고 나무를 심었다. 방송에서 봄날 이팝나무가 하얗게 핀 예쁜 정원이 나오면 당장 이팝나무를 심었고, 책에서 노란 살구가 익어가는 집이 나오면 어김없이 살구나무를 사다 심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나무를 심은 탓에 좁은 마당이 이제는 더 이상 심을 곳이 없게 되었다.
올봄에도 외수가 없었다. 소나무 옆에 있는 단풍나무가 지난 가을부터 시들시들하더니 끝내 말라버려, 농원 주인에게 박태기나무를 부탁했다. 그분이 우리 마당을 둘러보더니 단풍나무와 배롱나무 사이의 이팝나무를 뽑아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어떻게 키웠는데 …, 정말 실낱같았던 이팝나무였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그러면 단풍도 백일홍도 제대로 자랄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고 보니 뒷마당에 널찍널찍 심은 이팝나무는 어느새 그늘이 생길만큼 쑥쑥 자랐는데, 단풍과 배롱나무 사이에 심은 그 녀석은 자라다 만 잔챙이처럼 아직도 볼품이 없다.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함께 자라지 못한다고 칼릴지브란이 말했던가. 함께 서 있으되 거리를 두어야 각각의 나무가 제대로 성장하여 하나의 숲을 이룬다는 것이다. 온 몸에 가시가 돋친 고슴도치들은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붙어 있으려고 하면 할수록 가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고 한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말 못하는 고슴도치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
어디 고슴도치뿐이랴. 어쩌면 거리두기는 사람에게도 필요할 것이다. 전혀 모르는 타인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이웃으로부터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아무리 부모 자식, 부부, 친구사이라 해도 적당히 떨어져 있을 때 서로가 더 필요하고, 서로에게 더 소중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자칫 사람 사이의 거리두기는 관계가 서먹해지기도 하고,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고의 관계는 아무 말 없이 서로 바라보기 만해도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사이가 아닐까. 거리를 둔다는 것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동시에 상대방을 봄으로써 함께 행복해진다는 의미여야 한다.
문득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서 불렀던 팝송 ‘From a distance’가 떠올랐다. 멀리서 보면 지구는 푸른 물과 숲, 바다와 강이 보이고, 멀리서 보면 전쟁도, 질병도, 굶주림도 없는 세상이어서 서로가 희망을 가지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자는 내용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멀리서 본다는 것은 바로 적당한 거리두기가 아닐까?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지저귀는 새들도, 그들에게 아낌없이 보리똥을 주는 보리수나무도, 그걸 따먹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도, 어쩌면 거리두기를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람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역할을 다할 때, 멀리서 보면 함께 만들어 가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날 아침, 새들의 합창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노랫가락은 지금은 거의 잊혀 졌지만 드문드문 생각나는 것은 ‘From a distance' 한 대목이었다. (2014.6.28.)
* ‘From a distance' : ‘멀리서 보면’이라는 뜻으로 1990년 Bette Mildler가 불러 히트한 팝송으로 걸프전 당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 효 순
오늘도 새소리에 잠이 깼다. 어슴새벽이다. 바로 일어나기가 아쉬워 잠시 뭉그적거려 본다. 온갖 새들이 다 모였나 보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가지각색이다. 짹짹거리는 소리 사이로 옥구슬을 굴리듯 맑은 소리가 어우러지고, 이리저리 후드득 날아다니는 소리도 들린다.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벌써 며칠 째다. 이른 아침이면 새들이 마당 동쪽 끝에 있는 보리수나무로 모여든다. 가지가 찢어질 듯 주렁주렁 열린 보리똥이 빨갛게 익어가기 때문이다. 맛있게 차려진 아침상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새들은 신나게 보리똥을 따먹는다.
참새, 박새, 딱새…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그 새들은 물론이고 이름 모를 새들도 날아든다. 낮에는 다들 어디로 가 보이지 않다가 사람이 잠든 새벽녘에는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치고 다닌다. 가히 새들의 세상이다. 아침에 눈뜨면 바로 초록이 보이는 집에서 사는 것이 오래된 꿈의 하나였지만 이렇게 아침마다 새들의 노래까지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회색 아파트 숲에서 벗어나 이곳 봉실산자락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언 칠 년째다. 듬성듬성 심었던 마당의 잔디가 어느새 뿌리내려 새파랗고, 울타리로 심어놓은 나무들도 제법 많이 자랐다. 산수유나무, 단풍나무, 배롱나무, 이팝나무, 살구나무, 소나무, 감나무, 광나무, 목련 등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빼곡하다.
나무들이 자라면서 뜻밖의 문제들이 생겼다. 처음 묘목을 심을 때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적당히 띄어 심어야 했었다. 실 날 같이 어린 나무들이 하도 시원찮아 장차 클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너무 촘촘히 심은 것이다. 더구나 이사 때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거르지 않고 나무를 심었다. 방송에서 봄날 이팝나무가 하얗게 핀 예쁜 정원이 나오면 당장 이팝나무를 심었고, 책에서 노란 살구가 익어가는 집이 나오면 어김없이 살구나무를 사다 심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나무를 심은 탓에 좁은 마당이 이제는 더 이상 심을 곳이 없게 되었다.
올봄에도 외수가 없었다. 소나무 옆에 있는 단풍나무가 지난 가을부터 시들시들하더니 끝내 말라버려, 농원 주인에게 박태기나무를 부탁했다. 그분이 우리 마당을 둘러보더니 단풍나무와 배롱나무 사이의 이팝나무를 뽑아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어떻게 키웠는데 …, 정말 실낱같았던 이팝나무였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그러면 단풍도 백일홍도 제대로 자랄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고 보니 뒷마당에 널찍널찍 심은 이팝나무는 어느새 그늘이 생길만큼 쑥쑥 자랐는데, 단풍과 배롱나무 사이에 심은 그 녀석은 자라다 만 잔챙이처럼 아직도 볼품이 없다.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함께 자라지 못한다고 칼릴지브란이 말했던가. 함께 서 있으되 거리를 두어야 각각의 나무가 제대로 성장하여 하나의 숲을 이룬다는 것이다. 온 몸에 가시가 돋친 고슴도치들은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붙어 있으려고 하면 할수록 가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고 한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말 못하는 고슴도치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
어디 고슴도치뿐이랴. 어쩌면 거리두기는 사람에게도 필요할 것이다. 전혀 모르는 타인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이웃으로부터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아무리 부모 자식, 부부, 친구사이라 해도 적당히 떨어져 있을 때 서로가 더 필요하고, 서로에게 더 소중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자칫 사람 사이의 거리두기는 관계가 서먹해지기도 하고,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고의 관계는 아무 말 없이 서로 바라보기 만해도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사이가 아닐까. 거리를 둔다는 것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동시에 상대방을 봄으로써 함께 행복해진다는 의미여야 한다.
문득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서 불렀던 팝송 ‘From a distance’가 떠올랐다. 멀리서 보면 지구는 푸른 물과 숲, 바다와 강이 보이고, 멀리서 보면 전쟁도, 질병도, 굶주림도 없는 세상이어서 서로가 희망을 가지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자는 내용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멀리서 본다는 것은 바로 적당한 거리두기가 아닐까?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지저귀는 새들도, 그들에게 아낌없이 보리똥을 주는 보리수나무도, 그걸 따먹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도, 어쩌면 거리두기를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람대로, 자연은 자연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역할을 다할 때, 멀리서 보면 함께 만들어 가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날 아침, 새들의 합창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노랫가락은 지금은 거의 잊혀 졌지만 드문드문 생각나는 것은 ‘From a distance' 한 대목이었다. (2014.6.28.)
* ‘From a distance' : ‘멀리서 보면’이라는 뜻으로 1990년 Bette Mildler가 불러 히트한 팝송으로 걸프전 당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