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5
어제:
194
전체:
5,030,314

이달의 작가
2008.05.10 08:47

고통에 대한 단상

조회 수 277 추천 수 1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통에 대한 단상


                                                                                                                               이 월란





어느 병원의 산모대기실, 여기저기에서 배 불룩한 여자들의 짜증 섞인 신음소리가 병실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끝까지 기어올라야만 뭔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추락해야만 하는 소리다. 적잖이 발악을 해대던 옆 침상의 몸 풀 산모의 늙은 어미는 내가 지키고 있던 침상의 여자를 잠시 지켜보더니 말했다.
<색시, 소릴 질러. 소리라도 내 놓으면 좀 낫지>


내가 왜 거기서 그녀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보게 되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음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게 어금니를 악다물곤 간간이 이불깃을 움켜쥐고 입안으로 틀어넣기도 했었다. <독한 년> 그렇게도 생각했지 싶다.


옆에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은 늘 멀리 멀리, 우주 밖에 가 있다. 멀리 있을 때 그녀는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다. 육교 위에 엎드린 걸인에게 지폐를 꺼내주지 않곤 지나친 적이 없는 그녀는 늘 얼음 위를 걷고 있는 듯 차갑다. 어느 날, 그녀와 나란히 걷다가 난 보았다. 그녀의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음을. 그리고 두 발에 묻어 있는 선명한 상처들을 보았다. 12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상처를, 독극물을 삼킨 상처를, 넘치는 강물에 몸을 던진 상처를.


우린 한번도 서로의 몸 속에, 근원을 알 수 없는 급류를 안고 흐르고 있는 그 강물에 대해 말 한 적이 없다. 서로 너무 솔직해 진다면 우린 서로의 강물에 뛰어 들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상시에도 무대 위의 배우처럼 말을 한다. 그녀는 아침, 저녁으로 아무도 몰래 독주를 들이마시며 내일의 대본을 외우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다림의 미학은 어디에도 없었던, 조만간 빠져나오고야 말 생명의 변비에 걸려 양변기에 앉아 끙끙대던 그 병실에서 우린 아직 퇴원 수속을 마치지 않았던가. 고통의 순간에 난 곧잘 대본을 잊어버린다. 관객들에게 조롱 당하지 않기 위해 타인의 고통인 듯, 구경꾼의 침묵을 멋지게 빌어온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나누어 가질 순 없지 않던가.


벼린 슬픔의 날은 무엇이든 벨 수 있다. 유린 당한 마음의 치욕은 누구라도 고발할 수 있다. 삶의 곡예는 이리도 처절한 것을. 몇 켤레의 신발만을 남기고 갈, 욕망의 사슬을 두르고 치러내야 하는 평생의 형기(刑期)는 시퍼렇게 감금되어 있던 늑골 아래 미망(迷妄)의 샘물이 봇물처럼 터지는 날, 마침내 고통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불러터진 배로 고통까지도 포식하던 그녀와 난 자매지간이다. 내가 감당해 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어디인가. 가끔 숙질같은 슬픔의 사슬이 나의 사지를 묶어버리고 갑자기 찬 것을 들이킨 듯 숫구멍까지 시려오면 어디선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
<색시, 소릴 질러. 소릴 질러>

                                                                                                                            2007-09-04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71 데자뷰 (dejavu) 이월란 2008.05.10 277
» 고통에 대한 단상 이월란 2008.05.10 277
469 흔들리는 물동이 이월란 2008.05.09 277
468 견공 시리즈 목욕타임(견공시리즈 39) 이월란 2009.10.14 276
467 연인 이월란 2009.05.12 276
466 제2시집 봄탈 이월란 2008.05.10 276
465 겨울새 이월란 2008.05.10 276
464 가을주정(酒酊) 이월란 2008.05.10 276
463 날개 달린 수저 이월란 2008.05.09 276
462 청맹과니 이월란 2008.05.26 276
461 지금 이대로 이월란 2012.04.10 275
460 바람의 교주 이월란 2009.10.24 275
459 철새는 날아가고 이월란 2008.05.10 275
458 그냥 두세요 이월란 2008.05.09 275
457 견공 시리즈 숨바꼭질(견공시리즈 41) 이월란 2009.10.14 274
456 폭풍 모라꼿 이월란 2009.08.06 274
455 빛꽃 이월란 2009.08.01 274
454 춤추는 가라지 이월란 2009.04.09 274
453 시집살이 이월란 2009.04.05 274
452 CF* 단상 이월란 2009.01.15 274
Board Pagination Prev 1 ...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