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한 단상
이 월란
어느 병원의 산모대기실, 여기저기에서 배 불룩한 여자들의 짜증 섞인 신음소리가 병실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끝까지 기어올라야만 뭔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추락해야만 하는 소리다. 적잖이 발악을 해대던 옆 침상의 몸 풀 산모의 늙은 어미는 내가 지키고 있던 침상의 여자를 잠시 지켜보더니 말했다.
<색시, 소릴 질러. 소리라도 내 놓으면 좀 낫지>
내가 왜 거기서 그녀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보게 되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음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게 어금니를 악다물곤 간간이 이불깃을 움켜쥐고 입안으로 틀어넣기도 했었다. <독한 년> 그렇게도 생각했지 싶다.
옆에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은 늘 멀리 멀리, 우주 밖에 가 있다. 멀리 있을 때 그녀는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다. 육교 위에 엎드린 걸인에게 지폐를 꺼내주지 않곤 지나친 적이 없는 그녀는 늘 얼음 위를 걷고 있는 듯 차갑다. 어느 날, 그녀와 나란히 걷다가 난 보았다. 그녀의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음을. 그리고 두 발에 묻어 있는 선명한 상처들을 보았다. 12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상처를, 독극물을 삼킨 상처를, 넘치는 강물에 몸을 던진 상처를.
우린 한번도 서로의 몸 속에, 근원을 알 수 없는 급류를 안고 흐르고 있는 그 강물에 대해 말 한 적이 없다. 서로 너무 솔직해 진다면 우린 서로의 강물에 뛰어 들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평상시에도 무대 위의 배우처럼 말을 한다. 그녀는 아침, 저녁으로 아무도 몰래 독주를 들이마시며 내일의 대본을 외우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다림의 미학은 어디에도 없었던, 조만간 빠져나오고야 말 생명의 변비에 걸려 양변기에 앉아 끙끙대던 그 병실에서 우린 아직 퇴원 수속을 마치지 않았던가. 고통의 순간에 난 곧잘 대본을 잊어버린다. 관객들에게 조롱 당하지 않기 위해 타인의 고통인 듯, 구경꾼의 침묵을 멋지게 빌어온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나누어 가질 순 없지 않던가.
벼린 슬픔의 날은 무엇이든 벨 수 있다. 유린 당한 마음의 치욕은 누구라도 고발할 수 있다. 삶의 곡예는 이리도 처절한 것을. 몇 켤레의 신발만을 남기고 갈, 욕망의 사슬을 두르고 치러내야 하는 평생의 형기(刑期)는 시퍼렇게 감금되어 있던 늑골 아래 미망(迷妄)의 샘물이 봇물처럼 터지는 날, 마침내 고통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불러터진 배로 고통까지도 포식하던 그녀와 난 자매지간이다. 내가 감당해 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어디인가. 가끔 숙질같은 슬픔의 사슬이 나의 사지를 묶어버리고 갑자기 찬 것을 들이킨 듯 숫구멍까지 시려오면 어디선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
<색시, 소릴 질러. 소릴 질러>
2007-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