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24
어제:
219
전체:
5,030,139

이달의 작가
2008.05.10 10:39

옛날에 우린......

조회 수 408 추천 수 2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옛날에 우린......


                                                                                  이 월란




옛날에 우린
성냥개비로 막 싸놓은 똥을 찍어 습자지같은 채변 봉투에
담아 나란히 기생충검사를 받았었지
언 손을 호호 불며 조개탄과 물주전자를 나르는 당번을 번갈아 맡았었고
교실 마룻바닥에 줄지어 엎드려 초를 문지르며 무르팍 닳도록 윤도 내었지
분식의 날인 수요일이면 밥 대신 빵을 꼭꼭 씹어 먹었고
김칫국물 배인 교과서 귀퉁이에 코를 박으며 오뎅볶음 반찬을 찾아
양은 도시락을 들고 삐걱거리는 어항 속을 굶주린 열대어처럼 헤엄쳐 다녔지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달달 외우며 애국의 길을 배웠고
욕 잘하시고 잘 때리시던 선생님 앞에선
같이 가슴을 졸였고 같이 부끄러워 얼굴 붉혔었지
아~~ 세월은 무량히 갔어도
초록 나무책상 위에 연필깎기 칼로 금을 그어대며 전쟁을 선포했던 우린
삼십년 세월을 보낸 후 무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똑같은 경상도 사투리에
적진에서 아군의 암호를 확인한 듯 한 순간에 영원한 휴전을 선포했네
나의 얼굴은 잊었어도 너의 얼굴에서 지난 세월을 찾았네
나의 가슴은 잊었어도 너의 가슴에서 웅크리고 앉아 숨쉬는 유년을 보았네
일기장에 찍힌 빨간 확인도장처럼
너와 나의 가슴에 똑같이 찍혀버린 회한의 자국들, 추상의 그림자들
얼굴 마주보면 우린 열 두 살 소년 소녀로 둔갑해버리는 늙어가는 자동인형
나이값도 못하는 백치가 되어도 그냥 행복해, 마냥 즐거워
눈부신 어린 날의 가슴, 너와 나의 만남 속에서 콩닥콩닥 자라고 있네

-- 한국에 갈 때마다 행복의 순간들을 끊임없이 안겨주는 초등모임 친구들에게 --
                                                                                    
                                                                                    2007-12-20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51 제2시집 그리움의 제국 이월란 2008.06.17 227
450 제2시집 흔들리는 집 3 이월란 2008.06.16 201
449 수신확인 이월란 2008.06.15 205
448 제2시집 포효 이월란 2008.06.13 242
447 제2시집 아침의 이별 이월란 2008.06.12 253
446 비의 목소리 이월란 2008.06.11 277
445 주머니 속의 죽음 이월란 2008.06.10 335
444 핏줄 이월란 2008.06.10 242
443 둥둥 북소리 이월란 2008.06.08 338
442 꽃, 살아있음 이월란 2008.06.07 235
441 그리움 이월란 2008.06.05 231
440 당신, 꽃이 피네 이월란 2008.06.04 270
439 제2시집 김칫독을 씻으며 이월란 2008.06.03 228
438 제2시집 외로움 벗기 이월란 2008.06.01 225
437 홈리스 (homeless) 이월란 2008.05.31 268
436 비섬 이월란 2008.05.30 283
435 제2시집 꿈꾸는 나무 이월란 2008.05.29 256
434 부음(訃音) 미팅 이월란 2008.05.28 293
433 격자무늬 선반 이월란 2008.05.27 341
432 청맹과니 이월란 2008.05.26 276
Board Pagination Prev 1 ...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