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34
어제:
184
전체:
5,020,659

이달의 작가
2008.05.10 10:39

옛날에 우린......

조회 수 408 추천 수 2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옛날에 우린......


                                                                                  이 월란




옛날에 우린
성냥개비로 막 싸놓은 똥을 찍어 습자지같은 채변 봉투에
담아 나란히 기생충검사를 받았었지
언 손을 호호 불며 조개탄과 물주전자를 나르는 당번을 번갈아 맡았었고
교실 마룻바닥에 줄지어 엎드려 초를 문지르며 무르팍 닳도록 윤도 내었지
분식의 날인 수요일이면 밥 대신 빵을 꼭꼭 씹어 먹었고
김칫국물 배인 교과서 귀퉁이에 코를 박으며 오뎅볶음 반찬을 찾아
양은 도시락을 들고 삐걱거리는 어항 속을 굶주린 열대어처럼 헤엄쳐 다녔지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달달 외우며 애국의 길을 배웠고
욕 잘하시고 잘 때리시던 선생님 앞에선
같이 가슴을 졸였고 같이 부끄러워 얼굴 붉혔었지
아~~ 세월은 무량히 갔어도
초록 나무책상 위에 연필깎기 칼로 금을 그어대며 전쟁을 선포했던 우린
삼십년 세월을 보낸 후 무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똑같은 경상도 사투리에
적진에서 아군의 암호를 확인한 듯 한 순간에 영원한 휴전을 선포했네
나의 얼굴은 잊었어도 너의 얼굴에서 지난 세월을 찾았네
나의 가슴은 잊었어도 너의 가슴에서 웅크리고 앉아 숨쉬는 유년을 보았네
일기장에 찍힌 빨간 확인도장처럼
너와 나의 가슴에 똑같이 찍혀버린 회한의 자국들, 추상의 그림자들
얼굴 마주보면 우린 열 두 살 소년 소녀로 둔갑해버리는 늙어가는 자동인형
나이값도 못하는 백치가 되어도 그냥 행복해, 마냥 즐거워
눈부신 어린 날의 가슴, 너와 나의 만남 속에서 콩닥콩닥 자라고 있네

-- 한국에 갈 때마다 행복의 순간들을 끊임없이 안겨주는 초등모임 친구들에게 --
                                                                                    
                                                                                    2007-12-20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1 산그림자 이월란 2008.05.10 272
330 제2시집 목소리 이월란 2008.05.10 252
329 제2시집 곱사등이 춤 이월란 2008.05.10 370
328 틈새 이월란 2008.05.10 282
327 무서운 여자 이월란 2008.05.10 305
326 밤의 정가(情歌) 이월란 2008.05.10 244
325 제2시집 비행정보 이월란 2008.05.10 245
324 성탄절 아침 이월란 2008.05.10 288
323 눈꽃 이월란 2008.05.10 283
» 옛날에 우린...... 이월란 2008.05.10 408
321 완전범죄 이월란 2008.05.10 289
320 남편 이월란 2008.05.10 292
319 동일인물 이월란 2008.05.10 247
318 자정(子正) 이월란 2008.05.10 303
317 제2시집 꿈의 투사들이여 이월란 2008.05.10 352
316 제2시집 타임래그 (timelag) 이월란 2008.05.10 308
315 먼지 이월란 2008.05.10 251
314 노스탤지어의 창 이월란 2008.05.10 278
313 그 이름 이월란 2008.05.10 232
312 인연 이월란 2008.05.10 237
Board Pagination Prev 1 ...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