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129
어제:
176
전체:
5,020,930

이달의 작가
2008.05.10 11:28

기억이 자라는 소리

조회 수 239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기억이 자라는 소리


                                                                        이 월란




기억을 낳았다 하혈 한 방울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으로 머리카락 성긴 그 두상을 내밀었을까
남루한 영혼에 기생하는 기억은 때로
망막에 비친 호숫물만 마시고도 쑤욱 자란다
애저린 휘파람 소리를 뗏목처럼 타고 누워 자라기도 하고
풍향계가 가리키는 저 바람의 골을 따라
국경의 봄을 먹고 자라기도 하고
햇살이 맥박처럼 뛰고 있는 저 창가에 몸을 누이고 두근두근
붉은 심장 만하게 자라 있기도 한다
제라늄 꽃잎 아래 벌레처럼 오물조물 모여 자라기도 하고
막비를 물고 검은 새떼처럼 날아오기도 하는 저 기억들
그렇게 한 순간 내 키보다 더 훌쩍 자라 있을 때
새벽 한기같은 기억의 그늘에 앉아 울기도 했었나
기억은 그 큰 몸집으로도 날 달래주지 않는다
드라이브인 극장의 대형 스크린처럼 생생해도
필름 속에 갇혀 있어, 입이 없어,
한번씩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온 몸을 부딪쳐 창을 두드리는
저 지친 겨울의 진눈깨비로 밖에 태어나지 못하는 기억들
가슴이 도려내어져 뻥 뚫린 상체를 끌어안고 서 있는 기억들
어느 한 구석 몸저림이 올 때까지 눈을 맞추다
급히 돌아서는 기억의 몸은
수수억년의 능선 너머로 전생의 잔상인 듯
푸른 고요를 토해 놓고 손금같은 길을 한 순간에 거쳐
다신 돌아오지 않을 듯 소실점으로 멀어져 간다
놓아 준 기억 밖에 없는데, 놓은 자리, 파묻은 자리
더 깊은 내 가슴 속이었음을
기억의 태반에 씨를 뿌린 바로 나의 가슴 속이었음을
파랗게 날 세운 불립문자 한 조각에 가슴이 벤 후에야
아픈 머리채를 흔들며 돌아서는 기억

                                            
                                                                   2008-01-30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11 영시집 A hunch 이월란 2010.05.02 471
1410 치병(治病) 이월란 2008.05.07 471
1409 날개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이월란 2011.05.31 470
1408 제3시집 언어의 섬 이월란 2010.02.21 470
1407 영시집 Rapture 이월란 2010.04.05 469
1406 당신에게선 물 흐르는 소리가 나요 이월란 2009.12.20 468
1405 휠체어와 방정식 이월란 2010.03.15 467
1404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월란 2010.03.22 466
1403 치과에서 이월란 2009.12.31 466
1402 상상임신 3 이월란 2010.04.23 465
1401 하늘 주유소 이월란 2011.12.14 464
1400 사랑을 달아보다 이월란 2011.10.24 464
1399 어릴 때 나는 이월란 2011.05.10 464
1398 영시 윤동주시 번역 4 이월란 2010.06.07 464
1397 호텔 YMCA, 채널1 이월란 2010.05.25 464
1396 이별을 파는 사람들 이월란 2008.05.08 464
1395 바람개비 이월란 2010.08.22 463
1394 마지막 키스 이월란 2010.06.28 462
1393 오줌 싸던 날 이월란 2009.01.16 462
1392 제3시집 당신을 읽다 이월란 2014.05.28 461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