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자라는 소리
이 월란
기억을 낳았다 하혈 한 방울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으로 머리카락 성긴 그 두상을 내밀었을까
남루한 영혼에 기생하는 기억은 때로
망막에 비친 호숫물만 마시고도 쑤욱 자란다
애저린 휘파람 소리를 뗏목처럼 타고 누워 자라기도 하고
풍향계가 가리키는 저 바람의 골을 따라
국경의 봄을 먹고 자라기도 하고
햇살이 맥박처럼 뛰고 있는 저 창가에 몸을 누이고 두근두근
붉은 심장 만하게 자라 있기도 한다
제라늄 꽃잎 아래 벌레처럼 오물조물 모여 자라기도 하고
막비를 물고 검은 새떼처럼 날아오기도 하는 저 기억들
그렇게 한 순간 내 키보다 더 훌쩍 자라 있을 때
새벽 한기같은 기억의 그늘에 앉아 울기도 했었나
기억은 그 큰 몸집으로도 날 달래주지 않는다
드라이브인 극장의 대형 스크린처럼 생생해도
필름 속에 갇혀 있어, 입이 없어,
한번씩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온 몸을 부딪쳐 창을 두드리는
저 지친 겨울의 진눈깨비로 밖에 태어나지 못하는 기억들
가슴이 도려내어져 뻥 뚫린 상체를 끌어안고 서 있는 기억들
어느 한 구석 몸저림이 올 때까지 눈을 맞추다
급히 돌아서는 기억의 몸은
수수억년의 능선 너머로 전생의 잔상인 듯
푸른 고요를 토해 놓고 손금같은 길을 한 순간에 거쳐
다신 돌아오지 않을 듯 소실점으로 멀어져 간다
놓아 준 기억 밖에 없는데, 놓은 자리, 파묻은 자리
더 깊은 내 가슴 속이었음을
기억의 태반에 씨를 뿌린 바로 나의 가슴 속이었음을
파랗게 날 세운 불립문자 한 조각에 가슴이 벤 후에야
아픈 머리채를 흔들며 돌아서는 기억
2008-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