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8
어제:
306
전체:
5,022,921

이달의 작가
2008.05.10 11:28

기억이 자라는 소리

조회 수 239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기억이 자라는 소리


                                                                        이 월란




기억을 낳았다 하혈 한 방울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으로 머리카락 성긴 그 두상을 내밀었을까
남루한 영혼에 기생하는 기억은 때로
망막에 비친 호숫물만 마시고도 쑤욱 자란다
애저린 휘파람 소리를 뗏목처럼 타고 누워 자라기도 하고
풍향계가 가리키는 저 바람의 골을 따라
국경의 봄을 먹고 자라기도 하고
햇살이 맥박처럼 뛰고 있는 저 창가에 몸을 누이고 두근두근
붉은 심장 만하게 자라 있기도 한다
제라늄 꽃잎 아래 벌레처럼 오물조물 모여 자라기도 하고
막비를 물고 검은 새떼처럼 날아오기도 하는 저 기억들
그렇게 한 순간 내 키보다 더 훌쩍 자라 있을 때
새벽 한기같은 기억의 그늘에 앉아 울기도 했었나
기억은 그 큰 몸집으로도 날 달래주지 않는다
드라이브인 극장의 대형 스크린처럼 생생해도
필름 속에 갇혀 있어, 입이 없어,
한번씩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온 몸을 부딪쳐 창을 두드리는
저 지친 겨울의 진눈깨비로 밖에 태어나지 못하는 기억들
가슴이 도려내어져 뻥 뚫린 상체를 끌어안고 서 있는 기억들
어느 한 구석 몸저림이 올 때까지 눈을 맞추다
급히 돌아서는 기억의 몸은
수수억년의 능선 너머로 전생의 잔상인 듯
푸른 고요를 토해 놓고 손금같은 길을 한 순간에 거쳐
다신 돌아오지 않을 듯 소실점으로 멀어져 간다
놓아 준 기억 밖에 없는데, 놓은 자리, 파묻은 자리
더 깊은 내 가슴 속이었음을
기억의 태반에 씨를 뿌린 바로 나의 가슴 속이었음을
파랗게 날 세운 불립문자 한 조각에 가슴이 벤 후에야
아픈 머리채를 흔들며 돌아서는 기억

                                            
                                                                   2008-01-30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11 그들은 이월란 2008.05.08 435
1310 겨울비 이월란 2011.03.18 434
1309 견공 시리즈 엘리와 토비(견공시리즈 87) 이월란 2010.12.26 434
1308 내게 당신이 왔을 때 이월란 2010.04.18 434
1307 바람의 자식들 이월란 2010.02.12 434
1306 견공 시리즈 개같은(견공시리즈 2) 이월란 2009.05.30 434
1305 영문 수필 Do Memoirs Have to Be True? 이월란 2011.01.30 433
1304 제목이 뭔데 이월란 2010.08.22 433
1303 배아 이월란 2010.07.19 433
1302 나를 파먹다 이월란 2010.06.28 432
1301 사람이 그리울 때 이월란 2008.05.09 432
1300 다음 페이지 이월란 2010.09.26 431
1299 견공 시리즈 견공들의 인사법(견공시리즈 67) 이월란 2010.06.07 431
1298 중환자실 이월란 2011.12.14 430
1297 맹물로 가는 차 이월란 2010.10.29 430
1296 봄눈 2 이월란 2010.04.05 430
1295 바람의 그림자 이월란 2009.11.11 430
1294 사랑의 기원起源 이월란 2009.11.16 429
1293 클레멘타인 이월란 2010.06.12 428
1292 제1시집 부음(訃音) 이월란 2008.05.09 428
Board Pagination Prev 1 ...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