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속의 다짐

2005.01.17 12:01

전지은 조회 수:174 추천:3

  달력이 한 장 남은 것은 또 다른 달력을 걸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문우의 말에 동감하며 을유(乙酉)년 아침을 시작한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려 무던히 애섰던 지난 일년. 얼마나 잘 지냈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고 아직도 떠나온 곳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좋은 인간 관계들은 힘들고 답답한 일상들의 갈증을 풀어 주기에 충분했다. 성당 가족들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아줌마들의 모임이, 남편의 동문 가족들이 홀로 눈 속에 갇혀 버려 은둔자가 된 것 같았던 나의 모습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꺼내 주었다. 혼자가 아니고 함께 라는 것은 오늘을 지내기에 좋은 버팀목이 되었다.
  그 버팀목 중의 하나인 남편의 동문 가족들과 함께 만나 갑신년의 끝자락에서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시간을 같이 나누었다. 음식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작은 정성들을 주고받으며 정겨운 마음들이었다. 헤어질 시간쯤 덕담을 나누다가 제일 어른이신 선배님께서 좋은 제안을 하나 하셨다. 각자 새해에 이루고 싶은 일들을 두 가지씩만 적어보자는.
  첫 번 째는 내가 꼭하고 싶은, 일종의 꿈같은 희망이며, 두 번째는 물론 희망이어야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하고 나의 노력과 일상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실질적인 희망, 이라고 하셨다. 흰 종이에 두 가지를 명확하게 적어 봉투 속에 넣고 봉해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하였다가 연말쯤 또 다시 모이는 자리에서 함께 풀러 보면 한해동안 뭘 얼마나 이루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희망은 그냥 꿈처럼 떠 있기만 했는지 또는 현실적으로 한해 동안 얼마만 한 것을 이루었는지 가늠해 보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백지와 펜을 하나씩 나누어 드리자 주위는 사뭇 심각해 졌다. 생각이 머리 속에 있을 때에는 허황 되기도 하고 끝없는 상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문자로 쓰게되면 좀더 구체화되고 형상화되는 것 같다. 사각거리는 펜 놀림의 소리 속에서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각자의 봉투에 이름을 쓰고 한데 모아 다시 큰 봉투에 넣고 봉했다. 남편은 큰 봉투를 비밀스럽고 안전한 곳에 잘 보관하기로 했고 우리들은 밤늦은 시각, 'HAPPY NEW YEAR!'를 외치며 헤어졌다.
  각자의 봉투 속에 든 을유년의 다짐이 무엇인지는 아직 서로들 모른다. 그러나 자신들은 자기가 쓴, 형상화된 스스로와의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으로 올해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동녘의 해가 마을의 입구나 산정을 오르기도 전에 그 작은 빛을 감지하여 새벽을 깨우는 닭의 상서러움을 보면 그것은 진정한 희망의 상징인 것 같다. 닭은 또 예전부터 민간 신앙에서 액을 쫓고 복을 부르는 동물로 인식되어 폐백 상위에 놓여졌다. 금실 좋게, 복 받고, 오래오래 꿈을 엮으며 백년 회로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희망의 행위는 단념을 불허한다"는 옛 성인의 말을 기억하며 이 아침도 여명을 깨우는 닭의 목청 좋은 소리에 맞추어 희망을 찾아 떠난다. 을유년의 마지막 즈음 우리들이 다시 모일 자리에서 함께 펼쳐 볼 한해의 희망은 얼마나 이루어 졌을지 벌써부터 닭 벼슬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긴장되어 기다려진다.


(한국일보, 목요칼럼 2005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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