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있어? 나 뿐인데

2005.03.11 04:05

노기제 조회 수:174 추천:3

2005/02/27                             누가 있어? 나 뿐인데

   “아아아야, 아아아악, 아아아퍼”
   이어지는 비명에 숨이 턱 막힌다. 어찌 손을 쓸 수가 없다. 얼음판에 폭 고꾸라진 채 오른쪽 발목을 부등켜 잡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유리다. 웅성대는 한 무리가 유리를 둘러 싸고 있지만 속수 무책이다. 스케이트장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근래에 남자친구와 헤어져 혼자가 된 유리에게 아이스 스케이팅 강습을 권했다. 마침 딸아이가 쓰던 스케이트가 있다고 언제 한 번 같이 타자던 유리의 말이 생각 나 강습일정을 알려 주고 각각 다른 클래스에 등록을 했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아이스링크에서 여러 무리의 클래스가 진행된다. 유리는 초보자반에서, 난 고급반에서 각자 수업을 받고 이어지는 자유시간에 자기 실력껏 스케이팅을 즐긴다.

   그러다 유리가 넘어진 것이다. 그냥 좀 심하게 꽈당 했겠지 생각 했는데 심각한 모양이다. 일어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발을 만지지도 못하게 소리소리 지른다. 스케이트장 관계자들이 달려와 어찌 해 보려해도 속수무책이다. 스케이트라도 벗길가 했더니 그도 손을 댈 수가 없다. 구급차를 부를까, 911을 부를까, 그도 저도 다 도리질이다. 보험도 없고, 돈도 없다. 구급차를 부르면 그 비용이 엄청 날 꺼란 말만 하며 그냥 집으로 가겠단다.

   당장 숨 넘어가는 상황이 아니라서 우선 병원엔 안 간다. 곁에 있던 외국애들이 얼른 응급실로 데려 가라고 아우성들이다. 이게 우리 넉넉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다. 응급실로 가면 비용이 엄청 날꺼다. 그냥 참자. 날 밝으면 제대로 의사 찾아 가서 보통열차 편으로 진단 받으면 훨씬 비용이 덜 들것이다.

   가까운 식구 하나 곁에 없다. 딸 아이 하난 북가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 뿐이다. 남편은 없다. 이혼한지 8년이나 됐다.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지난번 감기 앓을 때 소홀한 모습 보여 헤어졌다. 당장 꼼짝 못하고 얼음판에 딩구는 유리를 집으로 옮길 사람은 나 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돈을 대주며 구급차를 부를 수도 응급실로 데려 갈 수도 없다. 나도 그럴 능력이 없긴 마찬가지다. 진짜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런경우 아무 생각

   도 하지 말고 그냥 필요 한 사람에게 도움줄 수 있을 만큼 내가 부자였음 좋겠다.

   다행히 유리의 통증은 숨을 돌린 듯 여럿이 부축하여 얼음판에서 옮기고 스케이트도 벗겼다. 급한대로 붕대를 얻어 오른쪽 발목에 살살 감아 주고 조심조심 집으로 데려갔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라지만, 정말 혼자 살 수만은 없는 것이 인생인 듯 답답하다. 누구 없을까. 이렇게 혼자 발목을 다쳐 꼼짝 못하고 있어야 하는 데 급하게 달려와 줄 아무도 없단 말이니. 갑자기 유리의 모습이 내 모습으로 바뀌면서 머리 속을 뒤져 본다. 누구 없을까.

   남편이 있다. 교회가 있다. 그리곤 캄캄하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연락을 할 수 있는 곳은 이 정도 뿐이다. 그런데 유리에겐 남편이 없다. 교회도 없다. 가깝거나 멀거나 친구들이 있지만, 이 밤중에 누구에게 연락을 할 수가 있겠으며, 연락을 해 본들 식구들과 잠자리에 들 시간이니 상당히 무리다.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 누군가가 없어 답답하고 막막할 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 돈이 많아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그것도 좋은데 이젠 그럴 능력이 내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나를 사용하며 살자.

   이튿날 유리를 업고 병원을 찾아 다니며, 내게 그럴 힘이 있었던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세 번째 의사를 만나 엑스레이 찍고 발 목 뼈가 둘이나 부러져 수술을 해야 된다는 말에 할 수만 있으면 그냥 부쳐보겠다고 케스팅을 선택한 유리는 수술 비용 때문에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 수술을 강압적으로 권유하지 않았던 의사도 문제가 있다. 잘 붙으려니 기대하며 이 주일을 지냈다. 다시 사진을 찍어 보니 더 나빠졌다고 수술을 해야 한단다.

   이름 난 의사를 찾아가 수술을 한 유리는 지금 회복중에 있다. 여기저기 수소문 해서 빌려온 휠 체어랑 바퀴달린 사각 지팡이도 있다. 더 이상 내가 업고 다닐 필요는 없다.

   유리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 자주 찾아와 도와주곤 하지만 그래도 아주 가까운 식구가 곁에 없다는 그 외로움을 누가 알까. 주위 친구들의 목청 높인 발언으로 결국 공부하는 딸 아이 호출해서 연휴동안 엄마 수술 뒷바라지 요긴하게 하고 돌아갔다.

   아이 공부에 지장있을까봐 알리지도 않았던 엄마 마음, 거기에 소식듣고 흔쾌히 달려 왔던 딸의 마음. 곁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마음들이다. 다시 혼자되어 밤을 보내는 환자의 마음이 마냥 안스러워 내 능력껏 드나들면서 이 말만은 해 주고 싶다.

   이젠, 남자친구 찾지 말고 아예 결혼 할 상대를 찾자. 같이 사는 남편이라면 아플 때 소홀했다고 갈라 서겠냐? 눈 흫기며 다투는 한이 있어도 그래도 곁에 있을 터이니,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살 수 있는 좋은 사람 만나길 기도하자 유리야.



2005년 3월 퓨전수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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