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2005.05.12 18:21

정찬열 조회 수:33 추천:1

  평양에 다녀왔다. 작년 말, 평통 LA지역협의회에서 북한 돕기 기금모금을 했었는데, 그 돈으로 비료와 염소를 사 가지고 전달하러간 것이다. 4월 30일 부터 7박 8일 일정이었는데, 헌법기관인 평통 해외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순안 공항에 내려 평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많은 구호들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김일성과 김정일을 따르고 미군을 몰아내자는 내용이었다. 통일교재단이 기증한 평화자동차에서 나오는 '휘파람' 광고표지판도 보였다. 산은 헐벗었고, 평양 시내는 밤이 되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묵은 고려호텔 주변에 가로등 몇 개가 서 있을 뿐, 해가 지면 거대한 도시가 어둠 속에 잠겨 들어갔다. 어둠에 잠긴 도시는 적막했다. 밤 12시가 지나서 들려오는 음침한 음악은 도시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안내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우리 일행은 개선문을 비롯한 평양시내 여러 곳과 묘향산, 진남포, 개성, 판문점 등 시외도 둘러보았다. 대동강 어느 정자를 방문했을 때, 아주머니 몇 명이 카드놀이를 하고 서양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이처럼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도 있었지만 대부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었다. 이따끔 일반인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안내원들은 매우 친절했으며 우리가 묻는 질문에 비교적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술자리에서 만난 어떤 안내원에게 '소문에 의하면 북한에서 백만 이상의 사람이 굶어죽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고난의 행군'기간의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94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기간은 2001년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이제 겨우 한숨 돌리는 정도지만 지금도 여전히 힘들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인해 수출입이 끊겨 기름이 부족하게 되고, 홍수와 가뭄이 계속되면서 식량생산이 줄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시골에서는 초근목피나마 먹을 수 있었지만, 평양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 말했다. 한숨을 돌렸다는 지금도 수도 평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정도이니 그 시절의 어려움이야 오죽했겠는가. 묘향산과 판문점을 오가는 길은 비교적 잘 닦여있었다. 그런데 자동차가 너무 적었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들이 오 분이나 십 분에 한 대씩 눈에 띌 정도였다. 분단의 상징 판문점에 들렀다. 선 하나를 그어놓고 남과 북이 갈라져 대치하고 있는 현장에서, 북한군 장교는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 이라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김일성 시신이 안치되어있는 금수산 기념관은 참배객들이 1Km가 넘는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김일성 광장에는 6·15기념 행사를 위해 학생들이 운동장 가득 마스게임을 연습하고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백성이 굶어 죽어 가는 나라. 그러면서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우상화를 위해 세계적 규모의 구조물을 만들어 놓은 나라. 핵을 놓고 세계최강 미국을 우롱하는 나라. 이해하기 힘든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나라가 개방되는 날, 거대한 기념물들은 좋은 관광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교육받은 유능한 일꾼들은 경제건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학습당에서 컴퓨터 공부를 하던 아이들의 진지한 모습, 엄마 품에 안겨 환하게 웃음 짓던 어느 꼬마, 여러 가지 특기공부를 하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는 길, 평양 담벼락에 색다른 구호가 언 듯 보였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5월 11일자 광주매일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