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한 그릇의 눈물

2005.08.07 08:25

강학희 조회 수:46




국밥 한 그릇의 눈물 / 강학희




    이십여년 동안 만나뵈었던 전할아버지, 일찍 유학생으로 오셨으니 미국에서 사신
    세월이 한국에서 사신 세월의 두 배가 넘으신다. 아주 일찍 사별하시고 혼자 지
    내셔도 늘 깔끔하게하고 다니시며 홀 아비의 태를 전혀 내시지 않으신다. 다행히
    아들들이 다 훌륭히 석.박사가 되어 요즘 흔히 말하는 "사"짜 달린 일들을 하여
    오가며 뒤를 보아 줄 일도 크게 근심할 일도 없으신 분이시다.

    워낙 조용하시고 성정이 유순하신 할아버님은 말씀도 높낮이가 없으시고 무례한
    일을 보시면 눈살은 찌푸리셔도 쓰다 달다 별 말씀없이 새겨만 두시는 그야말로
    젠틀맨이시다. 딸 하나 없이 아들들만 있으신 지라, 대부분 그러하 듯 할아버님
    이 아프셔도 아들들 중 누구도 만나본 적이 없고, 또 웬 일이신지 자제분들에 대
    해 말씀을 깊이 하시지 않으시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할아버님 처럼 조용한 성격
    으로 별 잔정이 없는 것 같다. 며느리가 한국 사람도 외국 사람도 다 있다 하시
    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오손 도손 사람사는 재미가 전혀 없으시단다. 생각보다
    다들 제몫 이상으로 잘 살긴하지만 동서남북 바쁜 일 때문에 무슨 때가 되어도
    오지는 못하고 돈들만 보낸다고 하시며, 수줍은 미소년의 어설픈 웃음을 지으시
    지만 왠지 서늘한 가을 바람 끝의 시린 겨울 모습이 그려진다.

    별 탈이 없으시고 지병도 없으시던 할아버님이 어느 날 갑자기 심장 질환으로, 양
    로 병원으로 옮기시게 되었다. 할아버님 말로는 자기가 너무 내성적이라 스트레스
    를 푸는 성격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마음의 화병이 있었을 거라며
    피식 웃으신다. 양로 병원에서도 그럭 다른 도움 없이 혼자 몸을 잘 추스르시고 점
    잖은 할아버지를 간호원들이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고 방문을 다녀 올 때마다 전해
    들으며 매번 내 안부까지 챙기실 만큼 정신도 밝으신데, 요즘 부쩍 쓸쓸해하시고
    우울해지신다고 하니 내 마음이 찡해졌다. 오랫동안 뵌 바로는 아마도 가족이나 친
    지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기에....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지난 추수감사절 바로 전 주일에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나는 차에 앉아 책을 보며 기다리고있다가 어째 남편이 생각보다 너무나 빨리 나온
    것 같기에 웬일이냐고 물으니 잠시 근처 한국식당엘 가자고 한다. 실은 할아버님께
    무엇이 제일 불편하시냐니까 식사라고 하시며 한국 음식이 많이 먹고 싶다고 하시
    기에, 그럼 무슨 음식이 제일 많이 생각나시냐니까 곰탕 한 그릇 먹었으면 참 좋겠
    다고 하시면서 조심스레 혹시 사다 줄 수 있겠냐고 물으시는데 눈물이 핑 돌아 "그
    럼요, 좀 기다리세요." 하고 나왔다 하니, 보지 않아도 할아버님의 외로움의 허기
    가 훤히 보여 나까지 덩달아 눈물이 났다.

    대개 다른 환자들을 보면 소화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의사의 특별 지시가 없는 한
    대부분 가족이나 친지들의 먹거리를 허락하는데 워낙 내성적인 할아버지는 아들도
    도 며느리도 다 다른 주에 있어 오지는 않고, 딱히 누구에게 부탁 할 숙기도 없으
    신지 담당 의사에게 이야기하신 모양이다. 너무나 마음이 안되어서 곰탕과 냄새나
    지 않는 종류의 반찬들만 사 가지고 아무래도 곰탕에는 깍두기가 있어야 제 맛이기
    에 따로 조금만 덜어서 냄새나지 않게 용기에 잘 싸서 병실로 둘이 함께 들어갔다.

    워낙 살이 없으신 분이 예전보다 더 많이 수척해지신 모습, 늘 말끔하시던 수염이
    더부룩하신 걸 보니, 산다는 게 참 서럽다는 생각이 울컥 솟는다. 그리 조용하시던
    분이 평상시처럼 눈 웃음도 아니고 반가워 손을 덥석 잡으시는 걸 보니 정말 많이
    외로우셨나보다. 이미 갖다 놓은 병원 저녁 식사 쟁반 위에 곰탕을 반정도 덜어 담
    아드리고 가져 온 반찬과 깍두기를 옆에 놓아드리니 감회가 새로우신 지 훅 크게
    숨을 한번 쉬시고 수저를 드신다. 한 수갈 떠서 잡수시더니 고개가 점점 더 많이
    수그러지신다. 후둑 눈물 방울들이 수저로 국으로 떨어진다.

    남편은 모른 척 간호 실로 가고 나도 모른 척 돌아서서 방 구경하는 척 하며 괜히
    칸막이를 스르르 끌었다 제 자리에 놓고는 슬그머니 돌아서니 할아버지도 모른 척
    천천히 국을 떠 잡수신다. 목이 메이시는지 많이도 못 잡수시고 나는 남은 국물은
    간호 실에 맡길 테니 달라고해서 잡수시라고 말씀드리고 할아버님의 앙상한 손을
    한참 꽉 잡아드리곤 돌아섰다. 고맙다하시는 벌건 눈자위, 목쉰 인사가 가슴을 콱
    메워 나도 모르 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툭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할아버지의 국밥 한 그릇의 눈물, 그 건 무엇이었나? 우리 인생의,
    전 인생의 참고 참으며 말 할 수 없던...외로움, 갈망, 인내, 회한, 분노, 허망...
    이 모든 것들이 거꾸로 떨어져 쏟아지는 저 목덜미, 우리 누구의 모습일 수도 있는
    그 국밥 한 그릇의 눈물에 만감이 교차한다. 때때로 내가 할아버지의 자리에 누워
    국밥 한 그릇의 눈물 일 우리 인생을 다시 들여다 보면 삶이 달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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