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년엔 사이좋게 살고 놀자

2005.08.18 04:09

정찬열 조회 수:47 추천:2


 
"사랑하는 엄마에게! 생일 추카 합니다. 매일 엄마 열심히 일하고, 승아랑 같이 예기도 하고 너무 고마워요. 내가 이번 년에 열심히 공부하구 좋은 학교에 갈게요. 우리 이번 년만 있어요. 사이좋게 살고 놀자. THANK YOU FOR EVERYTHING. I LOVE YOU!! - 승 -"
오는 9월이면 12학년이 되는 아들녀석이 엄마 생일카드에 쓴 글을 그대로 옮긴 내용이다. 뒷면엔 엄마와 녀석이 손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려 넣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카드를 엊그제 생일날 아침 출근하는 엄마가 보도록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12학년은 한국으로 치면 고3에 해당한다. 영어의 'this year'를 '이번 년'으로 표현했는데, 올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엘 가겠다는 녀석은 여름방학중인 지금 공부 대신 돈벌이에 열중하고 있다. 시간당 6달러 50센트인 기본급을 받으며 신발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색은 않지만 방학기간에 부족한 과목 보충도 하고 밀린 공부를 했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태평이라고 속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녀석은 그런 제 엄마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공부하라고 아들을 닦달하거나 가끔 성적표 때문에 이러니저러니 아들하고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건 주로 제 엄마였다.
우리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작문을 시켜보면 왜 한국 아빠 엄마는 입만 열면 '공부 공부'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왜 우리 부모는 내가 항상 올 A를 맞아와야 행복한가, 나는 왜 B나 C를 맞으면 안 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글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 것이 아이들에게 심한 강박관념을 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 때문인지 나도 내심 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바라지만 돈 버는 경험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두고 보는 입장이다. 딸아이도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는 9월이면 대학 3학년이 되는 딸은 금년 여름방학도 학교에 다니면서 백화점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다. 엊그제 엄마 생일날엔 하루에 600 달러를 벌었다며 생일 선물을 사 왔다. 세일기간이라서 물건 파는 액수에 비례하여 수당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 집 아이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정형편과 무관하게 많은 아이들이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자립을 강조하는 이 나라 교육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이번 년만 있어요. 재미있게 살고 놀자'라는 부분을 읽으며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엄마와 한 집에서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니 공부하라고 들볶지 말고 엄마와 아들이 평화스럽게 서로 웃으며 한해를 잘 보내자는 뜻이렸다. 대학에 가는 날이 부모 품을 떠나는 날로 아는 아이들인지라 아들이 가까이 있을 때 엄마가 좀 잘해주세요 하는 은근한 애교가 아닌가 싶다.
녀석이 어릴 때는 주말마다 아빠를 따라 한국학교에 다니면서 고분고분 한글을 배우더니, 머리가 커지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형편없이 틀린 카드를 보면서, 내 말을 듣지 않더니 겨우 이 정도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다. 어느 선배님이 변호사인 아들로부터 '왜 좀 쥐어 패서라도 한글을 더 가르치지 않았어요'라는 항의를 받곤 한다는 얘기가 떠오르고, 아들이 한글을 더 열심히 배우지 못한 걸 머잖아 분명히 후회할 거라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학교에 끌고 다니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다. 그리고 아빠가 한국학교 교장인 우리 집 녀석이 이 정도인데 다른 집 애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서툴고 삐뚤어진 글씨지만 한글로 또박또박 써서 카드를 만들어준 아들이 고맙다. 전하고 싶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한글카드가 영어로 쓴 카드보다 훨씬 반갑기도 하다.
나도 이번 년엔 아들하고 사이좋게 살고 놀아야겠다.
  <2005년 7월20일 광주매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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