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이 별처럼 빛나던 날
2005.08.18 03:54
"사람이 살다보면 벼라 별 일을 다 겪으며 살아가기 마련이지요."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이 지난 7월 21일 필자가 살고있는 오렌지카운티를 방문하여, '오렌지글사랑모임' 행사장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한 첫 말이다.
오렌지글사랑 모임은 이곳 오렌지카운티를 중심으로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월 한 번씩 만나서 공부하는 문학모임이다. 필자를 비롯한 몇 사람이 10년 전 7월에 창립하여 지금은 회원이 백 여명으로 늘어났는데, 올해 10주년 기념행사에 김 시인이 초대되어 강연을 하기로 되었던 것이다.
모처럼 본국 시인의 강연을 듣기 위해 글모임 회원은 물론 엘에이를 비롯한 인근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정작 초청 된 시인은 예정된 오후 7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머잖아 도착할 수 있다는 전화를 받은 후 연락이 끊기고, 8시가 되어도 그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조차 알 길이 없었다. 애가 탔다.
주최측은 연사가 도착하지 못한 사정을 설명하며 청중의 양해를 구했고, 다행히 청중들도 사정을 이해하여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늦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9시가 되도록 소식이 없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막막했다.
그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길을 잘못 들어 두시간 이상을 헤매고 있다는 얘기였다. 일방로를 거슬러 올라가다 하마터면 차가 충돌할 뻔했다고도 했다. 그 자리에 차를 세우고 택시를 잡아타고 행사장으로 오도록 했다. 예정보다 세 시간이나 늦은 열시쯤, 시인은 땀을 닦으며 행사장에 도착했다. 그 역시 간이 바짝 타 들어갔을 터였다.
시 한 줄로 청춘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글 한 편으로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더니, 오늘 이 순간까지도 우리들의 마음을 조리게 한, 그 시인이 드디어 도착했다는 사회자의 멘트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선 강연시간에 항상 30분 이상 먼저 도착하는데 미국에 와서 이런 실수를 하게되었다며 그가 정중히 사과를 했다.
강연은 높은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청중들도 분위기에 몰입되어 갔다. 시인의 얘기는 간결하고 쉬웠다. 어려운 문학얘기를 옛날 이야기 하듯 술술 풀어나갔다. 시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누구라도 쉽게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인이 아닌가 싶었다.
고향인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 마을에서 태어나 그가 졸업한 덕치 초등학교에서 36년 간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는 한편의 아름다운 시였다. 고향산천의 풀 냄새, 그 산과 들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논 밭을 가꾸는 마을 사람들의 땀내가 금새 행사장 가득 번져나갔다. 시인은 사람들을 오랜만에 따뜻한 고향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필자는 이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아왔지만 이렇게 많은 청중이 자정이 가깝도록 자리를 지키며 이토록 진지하게 얘기를 경청한 모습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앞자리에서 끝까지 강연을 듣고 난 다음, 나이든 어떤 분이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다'고 한마디를 했다.
흔히 이민생활을 사막에 비유한다. 낯 설은 타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숨가쁘게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면 사막이란 표현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 막막한 사막을 걸어갈 때, 목을 축일 샘물 한 바가지. 그 사막을 모국어의 편안함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갈 친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모임이 바로 오렌지 글사랑 모임이다.
이곳 오렌지카운티엔 약 20만의 한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글사랑모임을 만들어 1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월 모임을 가져오고 있다.
'별 일을 겪으며' 행사장에 달려온 김용택 시인, 그리고 고국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밤이 깊도록 함께 어울린, 고향의 향취와 문학의 향기가 넘치던, '별일이 별처럼 빛나던 밤'이었다. <2005년 8월3일 광주매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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