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2008년 선수필 가을호)

2009.05.29 19:23

조만연.조옥동 조회 수:496 추천:54

       모래시계        
                                                               조옥동

모래시계를 거꾸로 다시 세웠다. 은빛 모래알이 미끄러져 내리는 모래시계의 잘룩한 허리를 꼭 잡아본다.
요즘같이 비가 자주 오는 계절엔 얼마 전 사고로 큰 수술을 받은 내 다리의 통증만큼이나 심기가 매우 예민하게 반응을 일으킨다. 특히 연말이 다가오면 겨울철 독감이 유행하듯 우울증이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으로 후회의 마음들을 걸음에 무겁게 매달고 다니다가 묵은 해를 보내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사람들이 새 해를 맞는다.  

어느 시인은 새 해엔 “정신이 밥 먹여주는 세상을 꿈꾸는 것”을 서설瑞雪을 기다리는 마음속에 소원한다고 했다.  정신의 풍요와 삶의 풍요가 정비례하는 세상은 다우존스니 나스닥이니 하는 숫자놀음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혈압이 오르내리며 많은 시간을 인터넷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세상은 아닐 것이다.  
신년 초부터 눈 대신 내리는 봄비로 모든 잡념을 씻어 내니 모처럼 마음이 조용히 맑아진다.  창으로 뒤 울 안을 내다보니 겨울 나목의 매 마른 가지엔 벌써 윤기가 돌고 음지에 토라져 있던 아젤리아가 화사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눈빛을 맞춘다.  오렌지 나무 위의 앙증맞은 새집은 창문까지 열어놓고 머지않아 찾아 올 첫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 이른 봄에 찾아와 집을 짓고 알을 놓아 새끼가 자란 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그 철새가족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남편이 매달아 놓은 것이다.  이웃집 노랑머리 노부인한테 입양된 우리 집 고양이는 담장에 앉아 청승맞게 비를 맞으면서도 느긋하다.  
새해가 되면 새로운 열망을 실은 열차는 365일이나 되는 시간들을 앞세우고 힘차게 출발한다. 그러나 곧 새 포부와 목표는 점차 흐려지고 세월의 흐름에 무디어지기 십상이다.  봄여름이 가고 휴가철이 끝날 즈음에 가서야 마치 먼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 갈 날이 가까운 나그네처럼 사람들은 지난 여정을 뒤돌아보며 마음까지 조금은 지치게 된다.

누구는 세월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일이고 슬픔도 외로움도 세월이라 하였다.  시계바늘이 세월의 발자취를 차곡차곡 박음질하는 동안 사람들은 매일 만나고 느끼고 먹고 마시는 신진대사를 되풀이 하다가 어느 순간에 후다닥 놀래며 다급해진다.  모래시계의 미끄러져 내리는 모래알의 양은 실상 변함이 없는데도 마치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울 때가 가까워질 순간 모래알갱이의 속도처럼 말이다.  한 해의 끝이나 인생의 황혼기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이 또한 그렇다.  다람쥐는 가을만 되면 어디서 주워오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열매를 입에 물고 와 뒤뜰 화분마다 헤집고 허둥지둥 묻고 다니는 모습이 분주하다.  작은 짐승들도 이같이 계절의 흐름을 알고 있다.  
모래시계는 수 없이 많은 모래알이 흘러내리며 시간을 측정한다.  8세기의 프랑스 성직자 리우트프랑이 고안한 것으로 모래알의 종류, 크기, 모양이 고르고 습기가 없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4시간, 2시간, 1시간 또는 28초짜리 등 크기가 다양한데 그 당시에는 배의 항해속도를 측정하는데 사용했고, 3분짜리 모래시계는 계란을 삶는 시간을 재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나 자신이 모래시계 속에 있는 모래알이 되어 순간의 터널을 지나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숙명을 생각해본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돌멩이, 온갖 생물과 무생물, 바람과 구름 모든 것이 어우러져 세월은 흘러내린다.  
  일 년은 마치 365일이란 날짜의 모래알을 흘려 내리는 모래시계다.  실제로 마지막 한 알이 떨어지는 순간 모래시계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래시계는 180도 회전한 모습으로 또 다시 시작한다.  떨어지는 것은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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