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밭 선물

                                               조옥동

친분이나 감사 또는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가 선물이다. 무슨 기념일 또는 특별한 날을 맞아 기쁨을 전하는 뜻으로 주고받는다. 보기 좋게 포장을 하거나 예쁜 상자에 넣고 자기의 마음을 담은 작은 카드나 메모를 함께 전한다. 선물이란 단어의 뉘앙스는 크고 작은 분량 보다는 정답고 아기자기함이나 정중함을 연상케 한다. 받는 편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받았을 때 선물을 한 보람이 있다. 선물이란 이렇듯 어떤 대가성이 있거나 미묘한 복합성을 내포하지 않은 따뜻한 정감이나 존중 그 자체이다.

옛 사람들은 손수 수를 놓거나 염색한 보자기를 지금의 포장지 대신 이용하였다. 현재도 신부에게 보내는 첫 선물인 채단과 결혼한 딸의 시댁에 처음 보내는 예물인 폐백 음식은 청홍의 채색 보자기에 싸서 보내는 오랜 전통이 멋스럽다. 보자기를 쌀 때 만들어 지는 매듭 자체에서 양가의 마음을 결속시켜 주는 은유를 느낄 수 있다. 솜씨가 빼어나신 내 숙모님은 몇 해 전에 고희를 넘기셨는데 아직도 바느질을 하신다. 손수 지으신 치마저고리는 물론 개량 한복과 앞치마 상보 등 작은 소품까지도 가지각색의 천 자투리로 조각보를 만드시거나 수를 놓으셔서 그 속에 차곡차곡 싸서 바다 건너 이곳까지 때마다 부쳐 주신다. 외국에 이민을 가서 얼마나 외로우냐고, 모두 평안하라고 기도하시는 내용의 간곡한 편지를 소포 속에서 찾아 읽을 때엔 이런 귀한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세상에 나 밖에 없을 것 같은 고마움과 행복을 느낀다.  

절기가 바뀌면 때에 따라 산출하는 과일이나 푸성귀를 서로 나눠 먹으며 정을 주고받는다.  정직한 자연이 베푸는 선물만큼 풍성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는 가. 이제는 미주 땅에 살면서도 한국의 고유한 과일이라 할 수 있는 대추, 감, 배를 집 울안에서 따 먹는 가정이 적지 않다. 집 뒤뜰엔 30년 가까이 자란 정자 같은 오렌지 나무와 제법 큰 석류나무가 있어 가을이 되면 여름에 받아먹은 채소 대신 이들을 나눈다. 각 가정마다 특히 잘 되는 작물이 있는 것 같다. 여름철 누가 솜털이 막 벗겨진 애호박을 따다 주면 참 흐뭇하다. 이런 농작물은 특별한 꾸밈없이 소쿠리나 비닐주머니에 넣어 주고받아도 흉이 안 되는 마음의 선물이다.

초여름 같지 않게 기온이 차고 비가 올 듯 심신이 흐린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이란 포장도 안 되고 내 손에는 받아 들 수 없이 집 밖에나 두고 봐야하는 것, 곧 손바닥 대여섯 크기의 작은 채소밭이다. 모처럼 기분이 상기되고 큰 기쁨을 안겨 줬다.  

  오이가 조랑조랑 달렸다고 자랑하는 친구의 채소밭을 부러워했었는데, 남편이 집 앞 잔디밭 한 쪽 귀퉁이를 파헤치고 가장자리엔 붉은 벽돌을 둘러 예쁜 채소밭을 만들고 몇 가지 모종을 사다 심어 놓았다.
  몸을 겨우 가눌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여리고 가늘어 이리저리 엎드렸던 모종들이 지주를 세워주고 물을 주며 시선을 주었더니 며칠 사이 제법 기운이 돋았다. 아침에 눈뜨면 나가보고 들고나며 바라보고 해지기 전 다시 찾아보며 마치 애기를 돌보는 엄마의 즐거운 마음에 비길 만하다. 올 여름엔 가지와 상추 오이 고추 토마토를 바구니에 따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그동안 받기만 한 빚을 갚겠다는 상상을 하니 벌써부터 흐뭇하고 남편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다. 백악관의 미셸 오바마 부인의 텃밭이 부럽지 않게 됐다.

현대를 노마드의 시대라 말하든가. 이곳저곳 몇 번이나 이사하며 유목민처럼 살아 온 이민자의 삶에서 이제 채소밭을 가꾸며 안정된 농경민으로 정착함 같은 생각이 스쳐와 이 작은 텃밭이 주는 선물을 덤으로 받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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