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시사사 발행 「시인의 눈」

헤어질 바람은 낳지 말고

                                       조옥동

지난 밤, 우리는 잠시 서로 헤어져 홀로 손을 모으고 흩어진 시간의 서가에서
희미하게 지워지는 얘기들을 뽑았다 꽂았다 곱게 접어둔 순간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시험공부 때처럼 및 줄을 그어 놨던 그 시각 그 언어들, 영원한 음계로 가슴
흔들어 줄 줄 알았지. 아무도 모를 아픔에 진물처럼 고였던 신음소리, 기쁨이 넘쳐흐르던
도랑물 소리, 굼실굼실 새잎과 꽃향기의 옹알이들, 청춘의 심장은 그들을
기름처럼 불꽃처럼 사르며 접혀진 책장을 넘기듯 위험한 고개 몇 개나 넘었든가.

지나가는 것이 바람만이 아니라고, 새들 높이 오르며 떨어뜨리고 간 소리들, 찬란했던 날들의 눈부신 허상을 말하는 듯 태풍에 찢기고 부러진 새떼의 주검 앞에서, 덤불을 굴리며 달려 온 바람은 먼 산등을 넘어오다 잃어버린 동행, 허약한 바람이 놓쳐버린 손을 부끄럽게 접는다.

저들의 빈자리 채우지 못할지라도 다시는 헤어질 바람 낳지도 찾지도 말자.
종점을 향해 흘러서 가는 숙명, 열린 길 가고 가다 조금씩 외돌아 가는 길도 더듬고
간혹 머리 들어 하늘을 보며, 때로 고개 숙여 가슴을 쓰다듬다
그림자마저 흔적 없이 빈자리 하나 내어주는 것이라고

모래성을 쌓던 바람이 언덕 아래 어둠의 장막을 밀어내면
빛으로 채우는 아침 이슬, 눈을 떠 먼 산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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