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어느날/2013년"재미수필" 14집

2013.12.14 17:41

조만연.조옥동 조회 수:236 추천:13

8월 어느 날
                                                          조옥동/시인

모래가 매끄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곧 시간이 다 쏟아질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점점 빠르게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의 가는 허리를 꼭 잡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무척 겁이 많은 나는 무서운 장면이 스크린 위에 펼쳐질 때면 얼른 눈을 감아 버린다. 할머니가 된 현재까지 겁쟁이의 틀을 벗지 못하고 있다.
  차츰 자라면서 담대해지고 용기가 생길만한데 이상하게도 두렵고 무서운 것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어렸을 적 고향의 시골집 지붕은 짚으로 덮여 있어 해마다 가을이면 이엉을 햇 짚으로 엮어 새 것으로 갈아 올렸다. 동네 청년들은 추운 겨울날이면 두툼하게 덮어 올린 지붕의 추녀 끝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를 잡아 구워먹는 참새서리를 좋아 했다. 새집 속에 먼저 숨어 있던 뱀은 깊숙이 속으로 밀어 넣은 손을 물어 피를 흘리게 했다.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해치는 것을 본 후로는 뱀은 징그럽게 생겼다는 이유 이상으로 내가 싫어하는 동물이다.

철이 들면서 세상에서 제일 조심하고 주의하여야 할 대상은 맹수 같은 짐승이 아니고 안타깝게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히 있는 상대를 뒤에서 소리 없이 공격하는 수법이 뱀보다 더욱 간교하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혓바닥은 세치 밖에 안 되는데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다. 성경엔 최초의 인류조상을 혀로 유인하여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과를 따 먹게 하므로 낙원에서 쫓겨나게 했을 뿐 아니라 원죄를 짓게 만든 뱀이 등장한다. 사람의 혀는 어떻게 놀리는가에 따라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을 뿐 아니라 행복이나 불행을 창조하는 말을 말한다. 좋든 싫든 이같이 위력을 나타내는 혀를 가진 인간이란 존재가 두렵다.

인간은 타고난 무기인 지능을 사용하여 현대 첨단 무기종류를 계속 생산하고 있다. 사람이 직접 조종하지 않아도 전자 칩을 장착한 무인 선을 띄우며 지상에서 마음대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한 번의 스위치를 누르면 순식간에 수십 만 명의 생명을 재로 산화시키는 핵폭탄은 또 얼마나 가공할 무기인가?

내겐 인간이 만든 어떤 무기보다도 두려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계라는 물건이다. 시계는 세 개나 되는 혀를 갖고 있지 않은가. 시계를 볼 때마다 속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시침과 분침과 초침은 꼭 필요한 얘기를 할 것 같이 매초마다 머뭇거린다. 생각한 시간 보다 늦었을 경우는 민첩하지 못한 나를 채근하는 듯하고 반대로 앞서 빨랐을 때는 경거망동하거나 생각 없이 서두르지 말라고 뾰족한 혀끝에 꼬집힐 것 같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내는 소리다.
나에게 시계 소리는 보통 때는 의식되지 않거나 또는 편안하고 즐거운 음계로 들리다가 간혹 두려움에 젖은 가슴을 누가 똑똑 노크하는 소리 같고  간혹 뉘의 애처롭고 슬픈 소리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잠자리에서 들려오는 시계소리는 흔히 나를 깨워 변론을 하잔다. 잠을 설친 나는 또 하나의 나와 만나 물음과 적당한 핑계가 핑퐁을 치듯 계속 주고받으며 스토리를 이어가다보면 잠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날이 밝아온다. 시간이라는 두루마리 위에 세계의 역사는 물론 개인의 삶이 숨김없이 기록되고 있다는 자각이 무디어지려는 내 자신의 인식을 깨우려 어스름한 뇌 속에 가느단 불꽃을 켠다.

물은 거슬러 흐르게 할 수 있으나 시간은 영원히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세상엔 시간을 정지시킬 어떤 장수도 없고 마술을 걸 수 없다. 한 가지 방법은 생명체가 먼저 호흡을 멈추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일 어김없이 초를 다투며 긴장 속에 살면서 시간을 카운트한다. 특히 빨리빨리 문화 속에 익숙한 우리들은 하늘도 구름도 꽃도 바라볼 시간이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살아 갈수록 왜 인간이 시간이란 공포를 만들었는지 원망스럽다.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직 일출을 보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자연의 변화로 세월을 가늠할 뿐 느긋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면서 이마 위의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이나 헤며 주어진 날들을 살아 갈 수 있었을 터인데.

  누가 파란 보따리 두개를 꽁꽁 묶어 걸어 놓았다. 손으로 튕기면 쨍하고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8이란 숫자를 보면 현실과 이상이란 보따리 두개를 마주 꼭 묶어 놓았거나, 아니면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가느다란 허리에 매달려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온 뒤안길에 서서 상상의 깃털을 펼치던 8월 어느 날, 사방이 매끄럽게 닫친 8자형 모래시계 속에 갇혀 있는 나의 시간들이 거의 다 흘러내리고 있음을 숨 막히게 바라보고 있다.

저토록 푸른 하늘에서 호랑이가 장가갈 틈만이라도 소낙비나 한 줄금 시원하게 쏟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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