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시)  
어둠이 나를 삼킨다
        
                            조 옥 동                      


  어둠이 소리 지른다 노을을 벗으며 소리 깊은 뿌리를 내린다 대지를 움켜잡고 진통을 한다


  움츠린 그늘이 허리를 펴고 어둠의 꼭지를 틀면 핏물 쏟아지는 소리 가난이 배고픔을 몰아 넣고 군불을 때던 아궁이 저 목젖이 뜨거운 초저녁 피고의 자리에 나를 앉히고 침묵의 변론을 펴는 시간 주저앉은 산 메워진 강 하늘을 끌어당긴 마천루도 빛의 한계 그 위에 드러눕는다 혓바닥이 닿도록 엎드린 절대의 겸손이 한없이 편안하다 칙칙한 장삼을 걸치고 걸어가는 숲의 그림자 쫓는 우리의 뒷모습이 슬픈 계절 생명은 다가오는 저항의 연속인 것을 바람을 안고 몸부림치는 어둠을 먹자 어둠을 몸에 바르자 모든 빛이 하나가 된 깊은 빛 어둠을


  대지와 하늘 사이 멀고 먼 밀폐처럼 마음과 마음, 존재와 존재, 낮과 밤 사이 수 없이 가로 선 벽을 허물어내는 어둠이 나와 낯선 나 사이 벽을 허물고 나를 삼킨다 나를 먹는 소리 내 귀에 들린다










어느 묘비 앞에서


                            


오직 몸 하나가 전 재산이었던 육신만 믿고 의지하여
건강보험 하나 없이 밤일 찾아 헤매다 쓰러진 이들
불법 이민자는 캄캄한 지붕밑 땅 속에서야 얻어낸
꿈의 영주권 만져볼 기척도 없이 겨우 두 다리 펴고
누운 이곳은 이국의 공동묘지


부모가 돌아가고 자식들 혼사 소식에도 귀 막고
모른 척 가슴만 태우다 어느 날 뺑소니차에 치어 영원히
엎드러진 이야기, 총으로 뚫린 가슴, 기계로 잘려나간
손과 팔, 화마火魔로 찢긴 얼굴, 억울하고 서러운 얘기들
핏줄의 사랑마저 끊긴 생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저승문 두드리는 그리움과 통곡의 소리
장밋빛 노을은 아직 슬픔이다
반듯이 누워 하늘을 향했어도 움푹 무너진 눈속엔
아직 고향길 훤히 보이겠지


네모로 구워 만든 닮은꼴 수많은 묘비들 틈에
나의 비碑는 몇 모로 할까, 모난 것 말고
하얀 돌, 둥근 것이 좋겠다
?나의 고향은……
……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 샛터 마을?
또 하나의 묘비를 새긴다







시간은 두 발에 징을 박고  






시계 하나
벽에는 거울 한 개 빈 자리 지키고
아무도 찾지 않는 하루
울적한 고요가 방안을 채워도
거울은 표정이 없고 나른한 햇빛 한 줄기
문틈을 엿보다 돌아서는 꼬리도 잘리고
어둠이 밀려들면
갑자기 크게 울려오는 초침 소리
준비되지 않은 이별로 가슴에 못을 친다


눈물 보다 빠르게 안겨오는 이별
내일의 낯설음 때문에
오늘을 영원히 새겨 놓으려는 듯
뜬눈으로 자리를 지키는 거울
시간은 두 발에 징을 박고
어둡고 추운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어제와 오늘 매듭 풀고 이별을 재촉하나
내일의 만남을 향해 두터운 벽 뚫는 소리
옛 시간의 부스러기 떨구는 소리
접어 내릴 수 없는 세월의 두 팔 위엔
억만 번 홰를 치며 아득히 달려 올
파랗게 빛나는 새 시간들
눈부시게 매달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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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나는 당신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믿습니다




  두 차례, 미국 엘에이에 문학강연 초청을 받아 다녀온 적이 있다. 수월찮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현지문인들을 만났다. 푸른 꿈을 안고 큰바다를 건너 이제는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2세대, 3세대는 모르겠거니와 이민 1세대들은 떠나온 조국을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고 여전히 한국어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다. 더러는 취미 차원에 머문 경우도 있었지만 스터디 구룹을 결성하고 진지하게 문학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짐작컨대 한국어로서의 문학창작에 있어 한 붐을 형성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다행스런 일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조옥동 시인은 일찍이 미주시문학회를 결성하여 동료들을 모으고 한국말로서의 시쓰기에 끊임없이 열중해온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다. 이미 그 지역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절차를 거치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고국의 권위있는 문예지의 관문을 거치고자 작품을 보내왔다.
  조옥동 시인의 작품의 특징은 우선 젊다는 데에 있다. 젊다는 것은 아직 가능성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언어 표현이 짜임새 있고 빈틈이 없다. 아직도 풀기 꺾이지 않은 숨결이 있고 현실의 삶과 맞서는 팽팽한 긴장도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시의 내용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겸허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세상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세상을 반응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그릇이 충실하지 못하면 보다 좋은 세상을 담을 수가 없는 법이고 리트머스 시험지가 순결하지 않으면 우주의 섭리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법이다. 조옥동 시인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둥글고 깊은 그릇이고 순도 높은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앞으로 그의 시가 이국적인 삶과 정취를 얼만큼 잘 수용하고 또 그것을 반추하여 그만의 독특한 노래와 그림으로 변주해 내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그만의 과업이라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겸허한 시의 그릇과 정결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믿습니다. 보다 크고 넓으면서도 섬세한, 보다 선명하면서도 깊고 그윽한 시세계를 앞으로 열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추천위원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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