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갈피 속에 접힌 아픔을 만나기 위하여

이 승 하(시인 · 중앙대 교수)



21세기인 지금 시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국에서 살면서 한글로 시를 쓴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계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다. 테트리스를 비롯한 각종 온라인 게임, 인터넷 포커와 바둑, 사설 경마와 경륜, 슬럿머신……. 우리는 기계의 힘을 빌려 정보를 입수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오락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물건을 사고 팔고, 돈을 벌고 쓴다. 기계는 모르는 것이 없는 척척박사이고 없는 것이 없는 백화점이며 볼 만한 영화가 즐비한 영화관이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운동장이다. 우리의 삶은 일거수일투족이, 아니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전히 기계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로봇까지 다양하게 개발이 되고 있으니 우리는 점점 더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이다. 기계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이 과연 풍요로운 삶일까.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주로 하는 것은 자연 파괴이다. 개발과 건설의 논리를 따르면 길이 뚫리고 멋진 집이 세워지겠지만 밭이 사라지고 숲이 사라진다.
이 세상의 하고많은 사람 중에서 시인은 이런 개발과 건설의 논리를 배격하고 우직하게 원시적 삶을 고집하는 존재이다. 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시를 쓰기는 하지만 기계적 삶이 아닌 깊이 있는 영혼의 삶, 진리를 추구하는 삶,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를 탐색하는 삶,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삶, 일상적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는 삶……. 뭐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현대의 원시인이 바로 시인이다. 시인이 시를 쓰고 문예지에 발표하고 시집을 묶어내는 행위도 어찌 보면 자본주의의 논리와는 무관한 전근대적인 삶의 방식이다. 조옥동 시인의 시집 원고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미국에서도 LA 같은 큰 도시에 사는 시인이 미국의 첨단 문명을 노래하지 않고 광활한 미국의 자연 풍광과 한국에서의 궁핍했던 성장기에 큰 비중을 두고 이를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인은 미국에서 일자리를 마련했으므로 영어를 일상적으로 쓰겠지만 집에 돌아와 시를 쓸 때는 모국어를 지키는 한글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국내 시인들은 넘쳐나는 문예지에 앞을 다투어 시를 발표하고 있는 데 반해 미국 거주 시인들은 연중 발표할 기회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를 써 시집을 묶어낸다는 것은 시에 대한 열정이 보통 불타서는 될 일이 아니다. 시집 앞머리에는 미국 이민 생활 초기의 고생담이 몇 편 실려 있다.  

마미, 마미, 마미……
아이들은 열심히 재미있어 하고
엄마란 소리가 온전히 바뀐 식탁에서
아이들의 고국은 아득히 멀어져가 어미는
음식을 씹어 삼키어도 그리움은 소화되지 않았고
―「이민 초기」 제2연

아이들은 영어도 빨리 배우고 미국 생활에 적응도 빨리 하지만 엄마인 화자는 그렇지 않다. 음식을 씹어 삼켜도 그리움이 소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거의 향수병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 아닐까. 상당히 긴 「남겨진 노래」는 시인 자신의 일대기이면서 가족의 이민사이기도 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개척한 이민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시인 역시도 고생을 참 많이 한 듯하다.

W. U. 의과대학 7층 애비오리 박사 내분비과 연구실
누런 피부색의 내 옆을 스치는 백인들 친절하게
코리아는 어디에 붙은 땅이냐 묻는 멸시의 시선을
‘무식한 것들’ 고개 돌려 흘겨주었지
서러움과 고달픔의 과녁을 뚫어 날려보낸 화살
하늘 끝을 울며 서성이던 이국의 겨울은 눈물조차 얼어붙어
눈 속에 파묻히는 설한雪寒의 엄동에도 가슴에 지닌
꿈 보따리는 놓치지 않으려 꼭 껴안고 뒹굴었지
―「남겨진 노래」 부분

현재 UCLA 의대 생리학연구실에 재직하고 있는 시인이 지난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미국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인종차별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기도 하다. 차별의 서러움과 생업의 고달픔을 겪으면서도 시인은 가슴에 지닌 꿈 보따리를 놓치지 않으려 꼭 껴안고 뒹굴었다고 한다. 꿈 보따리는 시에 대한 열망이 아니었을까. 머리말에 나와 있는 그대로, 미주로 이민을 온 후 20여 년이 지나고 있을 때 끊긴 테이프처럼 어두운 곳에 주저앉아 있던 그녀에게 다가온 한 줄기 빛이 바로 시였다. 그래서 「남겨진 노래」의 끝을 “목숨이 질겼던 슬픔의 빛/ 온전히 산화하지 못한 언어들 불러모아/ 하늘 높이 향기로 사르고 싶다”고 끝맺은 것이 아니겠는가. 시의 씨앗이 된 것들은 뇌리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모습, 그리고 그때 그 마을 사람들이었다.

초가집들 사립문은 사철 열려 있고
가을엔 시루떡 겨울엔 얼음 동동 띄운 동치미국수  
여름엔 햇감자 찰옥수수 광주리째 디밀어 정을 나눠 먹느라
이웃집 개구멍도 크게 뚫린 샛터 마을엔
전쟁에서 죽은 남편의 나라를 사랑한 일본각시
나막신 끄는 소리 먼 샘물을 길어 나르고
축 처진 치마허리 위에 진예 어미 가슴은 항상 노브라
물동이 아래 마른 검정콩 두 개 달라붙어 있었지
―「씨앗이 된 것들」 제2연

미국에서의 삶에 조금씩 적응해갈수록 더욱 선명히 떠오르는 것이 어린 시절의 풍경이니 알다가도 모를 일. 그것은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본능과도 같은 수구초심(首邱初心) 때문이었다. 시인의 수구초심은 로키산맥을 지날 때도 여전하다. 산허리 잡고 돌아가다가 흰 눈 덮인 바위들 틈에서 고향 겨울의 기침 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로키산맥을 지나며」). 아마도 시인이 미국으로 가지 않고 국내에서 계속 살면서 시를 썼더라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이 정도로 사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름엔 햇감자와 찰옥수수를, 가을엔 시루떡을, 겨울엔 얼음 동동 띄운 동치미국수를 먹었고, 그 맛은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아도 잊을 수가 없다. 집의 아이들도 엄마 손으로 직접 해주는 김치찌개와 떡국, 파굴전을 좋아하는가 보다. 피자를 잘 먹던 아이들이 장성해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는 이런 음식을 찾는다.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고향 생각이 나는 것인가. 시인은 「어느 묘비 앞에서」라는 시에서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 샛터 마을”이라고 자신의 고향을 밝히고 있고, 「금사리 초겨울」에서는 고향의 모습을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복원해낸다.

산허리 뼈마디를 세우고
낮은 들판이 잔털을 밀어내던
산 마을 한나절이 총총히 떠나면
동구나무 위 까치 울음 속엔
기다리는 소식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갈잎들 그리는 이의 발자국 소리를 낸다

들국화 자지러진 들길이 허전하여
재 너머 노을이 삼태기째 쏟아지고
외딴 샘 별빛을 헹궈내는 긴긴 밤 지샐 때
빨랫줄 하얗게 그려 논 눈썹을
참새부리 황금빛 햇살 물어 지우고 지우면
은총으로 열리는 다스운 아침

금사리金寺里 두른 안개 강엔
바람으로 씻기어 바랜 꿈
하얀 징검다리 하나 하현달이 놓인다
―「금사리 초겨울」 전문
제목 그대로, 산촌 금사리의 초겨울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시의 소재와 주제가, 내용과 표현이 모두 지극히 한국적이며, 전통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준다. 시인의 기억 속 금사리 초겨울 풍경은 전혀 을씨년스럽지 않고 따뜻하기만 하다. 고향 금사리는 시인에게 미국에서 살아가게 되었기에 더욱더 그리운, 마음속의 천국이 되었다. 아래의 시는 이효석과 이태준의 소설을 방불케 한다. 이 시 역시 고향 샛터 마을을 그린 풍경화이다.

숯검정 가득 띄운 장독 속에 사위의 어둠을 담아놓은 거대한 항아리, 그 입 크게 벌린 샛터 마을, 입술로 잔잔한 하늘을 핥아내면 솜사탕처럼 녹아지는 은하수 건너편 입 속으로 곤두박질하는 별똥별의 세상은 뼈마디까지 부러지며 흐느낀다

먹고개를 지나 펴지는가 하면 굽어지고 돌아가면 또 막히는 고단한 길 위에서 새까맣게 박음질한 긴 문장들의 요점을 찾아내려는지 밤을 쪼아 두려움을 털어내는 새들과 조각달의 창백한 얼굴이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보다 긴장하여 또 한 차례 초조하다
―「옛 기억 중에서」 부분
시인의 밤 풍경 묘사는 세밀화를 그리듯이 붓 터치가 아주 정교하다. 시인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신라의 화가 솔거가 그린 그림에 새들이 날아왔다고 하는데 조옥동의 풍경화 시도 사실성이 대단히 뛰어나다. 「달이 있는 가을밤」 같은 정(靜)의 세계도 아름답지만 「미시령고개 너머 아침은」 같은 박진감 넘치는 동(動)의 세계도 무척 아름답다. 이런 몇 편 시의 사실성은 언어로 그리는 시인의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시인은 풍경 묘사에 비상한 재능을 보여준다.
시인은 미국에서 간간이 여행을 다니는데 「맨해튼의 하루」 같은 도회지 여행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가 시원(始原)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미국 서부의 대자연을 보고 쓴 것이다. 시인은 데스밸리라는 곳에 대한 인상이 특히 깊었는지 연작시 3편 외에도 2편을 더 쓴다. 데스밸리라면 죽음의 계곡이라는 뜻인데 그곳은 시인에게 도대체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끝내 지우지 못한 욕심의 점 하나마저 죽어
바람의 품에 모래알로 누우면
억 년을 달려온 별빛
전생의 내 영혼을 만나는 곳 사막은
꿈속처럼 포근한 땅 기다림이 숨쉬는 곳
―「데스밸리 1」 부분

살고 싶은 욕망이 죽고 싶도록 괴로울 때는
죽음이란 휴식의 뿌리에 숨소리가 달싹이는 곳
주검의 색이 아름다워 생명을 부끄럽게 만드는
나는 죽어 묻어놓고 살아 나오는 땅으로 간다
삶은 죽음을, 죽음은 삶을 업고 세월의 무게 겨워
짓눌린 자락마다 피 흘리는 땅
―「데스밸리 2」 부분

시인은 불모의 땅에 와서 삶과 죽음의 차이를 비로소 깨닫는다. 억겁 세월 동안 수없이 죽어간 생명들의 주검을 안치하고 있는 데스밸리에 오니 인간의 생이란 참 얼마나 짧은 것인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새삼스레 깨달으며 전율한다. 「사구」와 「이방인」 같은 작품도 생로병사의 비의를 묻고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시간은 이 세상 모든 목숨을 거두어 가는 저승사자이다.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데스벨리의 모래언덕에 와서는 생명의 역동성을 느끼며 삶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골짜기마다 부화하는 또 다른 생명들
내 잊어버린 소망도 거기
질기게 꽃 피고 싶다
―「사구」 부분

허공을 뚫고 모래 속에 뿌리를 내리는 별빛은 밤마다
허망한 생명의 시를 쓴다 생존은 어차피 질기게 살아남는
연습의 반복인 것이라고, 장엄한 교향시 탄주하는
사막은 벌거숭이가 아니다
모래는 밤낮 날실과 씨실로 무늬를 짜 사막을 감싼다
―「이방인」 부분

사막에서 꽃은 선인장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나무에서만 피어난다.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죽어 있는 듯하지만 사막에 가서 모래를 파헤치면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들이 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생존을 하기 위해 “질기게 살아남는/ 연습의 반복”을 해야 한다고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시인이 로키산맥에 가서나 캘리포니아 국립공원의 세쿼이야 숲, 기(氣)가 세다는 세도나, 캐나다 요호 국립공원에 있는 에메랄드 호수, 옐로스톤 공원 등에 갔을 때 느끼는 것은 대동소이한 것 같다. 자연의 유구함과 인간의 유한함이다. 자연의 건강함과 인간의 허약함이다. 자연의 정직함과 인간의 교활함이다. 문명비판과 자연예찬을 표나게 하지는 않지만 자연이란 인간의 관점에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제 스스로(自) 그러한 것(然)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두어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된다. 사막은 벌거숭이가 아니라 겹겹이 옷을 입은 변신술의 천재이다.
시인이 시집의 후반부에 가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시의 소재는 시간이다. 시간은 바위가 모래가 되게 하고(풍화작용), 땅이 층을 쌓게 한다(지층). 뽕나무밭을 푸른 바다로 만들며, 홍안의 소년을 백발노인으로 만든다. 「황혼」이란 시부터 보자.

온종일 건너온 고해를
피안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는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수평선 위에
바닷새 한 마리
불타고 있다

하루의 제물을 바치고 있다
―「황혼」 전문  

황혼이란 흔히 인생의 황혼과 일몰 시각 두 가지를 의미한다. 시인은 이 시간대를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공간으로 설정했는데 수평선 위에서는 바닷새 한 마리가 불타며 하루의 제물을 바치고 있다. 황혼의 시각이 신화적인 공간으로, 또 환상적인 세계로 탈바꿈하는 놀라운 전이를 보여주는 시가 「황혼」이다.

열광하는 느낌표  
함성 쏟아지는 경기장을 떠나야 한다  
잊혔던 마침표가 희미하게 나타나
침묵의 시간이 밤하늘 별빛으로 흐르면  

때로는 ‘돌아서 가라’는 표지판을 읽어도
빨강 불이 끔벅이는 건널목에서 바쁜 길
멈출 수 없는 진행형의 오늘은
기쁨과 슬픔의 자리에 붉고 굵은 밑줄을 그으며
의미 있는 웃음을 입술에 칠한 후
무거운 어깨로 밀치고 들어서는 문
하루를 닫는다
―「기다림은 (  ) 속에 묶어두고」 부분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우주라는 공간이 빅뱅 이래 계속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시간도 태초 이래 앞으로만 가고 있을 뿐이다. 타임머신은 상상 속의 기계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시간의 진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함성 쏟아지는 경기장을 떠나야 하고, ‘돌아서 가라’는 표지판을 읽어도 멈출 수 없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인간은 내일을 기다릴 줄 아는 존재이다. 내일이 있기에 너그러운 용서의 청구서를 띄우고 화해의 영수증을 건넬 수 있지만 “미움의 손바닥에서/ 기다림은 아직도 (  ) 속에 묶어두고” 있다. 조금 난해한 표현인데, 인간은 시간을 헤아려 쓸 줄 아는 존재, 내일을 설계할 줄 아는 존재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시간의 설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살이의 화려한 배설물은
영원이란 언어의 바다 속에 퇴적되는데
우주는 팽창하고
죽은 갈릴레오는 계속 지구를 회전시켜
휴식을 절대 잃은 하루살이의 본능은
계속 순간순간 시간을 자르고 있다
―「하루살이」 부분

하루살이가 딱 하루만 살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빨리 죽는 미물이다. 하지만 시인은 하루살이의 화려한 배설물이 영원이란 언어의 바다 속에 퇴적되고 있다고 했다. 과장이 심한 것이 아니라 역설의 방법이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갈릴레오가 지구를 계속 회전시킨다는 발상도 그렇지만 휴식을 잃고 일하는 하루살이의 본능이 “계속 순간순간 시간을 자르고 있다”는 표현도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축제이다.

시계 하나
벽에는 거울 한 개 빈 자리 지키고
아무도 찾지 않는 하루
울적한 고요가 방안을 채워도
거울은 표정이 없고 나른한 햇빛 한 줄기
문틈을 엿보다 돌아서는 꼬리도 잘리고
어둠이 밀려들면
갑자기 크게 울려오는 초침 소리
준비되지 않은 이별로 가슴에 못을 친다
―「시간은 두 발에 징을 박고」 제1연

시간은 우리에게 이별을 선물하기도 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다. 시간은 만남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내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이별할 때는 다시 만날 기약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사별하면 저승에 가서야 만날 수 있는 법. 하지만 시간만은 억만 번 회를 치며 아득한 곳에서 나를 향해 달려온다. 이 시의 제3연은 눈이 부신 공감각적인 표현이다.

오늘은 어제의 매듭 풀고 이별을 재촉하나
내일의 만남을 향해 두터운 벽 뚫는 소리
옛 시간의 부스러기 떨구는 소리
접어 내릴 수 없는 세월의 두 팔 위엔
억 만 번 홰를 치며 아득히 달려올
파랗게 빛나는 새 시간들
눈부시게 매달려 온다
―「시간은 두 발에 징을 박고」 제3연

시계를 본다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
무얼 할까
시계가 나를 쳐다본다

(……)

시계는 두렵다
시계는 뛰고 있다
고여 놓은 사랑 오직 한 길을 향해
샘물 떠 그에게 드릴 시간 기다리는 인내가
새벽안개같이 주검같이 어디쯤에서 끝날 것인가
―「시계는 두렵다」 부분

물론, 시간의 흐름이 두렵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시간의 躍㎱?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시간 아까운 줄을 알아, 시간을 잘 쪼개어 써야 하는 것이다. 「시계는 두렵다」는 시계를 의인화한 작품으로, 발상의 참신함이 정수리를 때린다. 시계가 나를 쳐다본다는 것도 그렇고, 시계가 두려움을 느껴 뛰고 있다는 표현도 무척 신선하다. 아닌게아니라 시계는 초침과 분침이라는 다리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놈이니까. 시계는 뛰다가 때가 되면 멈추는 존재이고 조옥동이라는 이름의 시인도 때가 되면 숨쉬기를 멈출 유한자이지만 시를 씀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구가할 수 있다. 문학의 생명력은 시공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니까. 뭐 이런 시구를 떠올려본다. ‘시계는 시간 가는 것이 두려워 바삐바삐 걸어간다.’ 시인은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본다.

늙는다는 것 세월을 향한 약속입니다
약속의 층계를 열심으로 오르내려
붉은 신호들 예서 제서 번쩍이고
실핏줄 끝에서 신음하는 밤마다
청보리밭 이랑에 물결치던 어린 봄바람은
이마의 잔주름을 간지럼 핍니다

(……)

허술하게 늙는 것 아니라고
씨앗이 씨앗을 얻기까지 계절의 속살거림 모두 새겨
도드라진 상처로 단단한 껍질 때문에 그 약속 아름답고요
늙어 가는 일은 세월과의 약속입니다
어제와의 탯줄을 끊고 새것으로 태어나는
이 약속을 지키려 계속 몸살을 합니다
―「약속」 부분

어린 봄바람이 이마의 잔주름을 간지럼 핀다는 제1연 마지막 부분이 재미있다. 제3연의 네 번째 행 “늙어 가는 것은 세월과의 약속입니다”라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씨앗이 씨앗을 얻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그것이 무의미할 턱이 없다. 단단한 껍질을 얻는 데는 인고의 시간과 기다림, 성숙의 과정과 세월과의 약속이 필요하다. 개체만 갖고 말한다면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이 허무하겠지만 그 개체는 살아생전에 사랑을 했고, 새로운 생명체 탄생의 기쁨을 누렸고, 세월과의 약속을 지켰다. 거기에 예술을 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비축해두는 지혜까지 발휘했으니 그 인생은 완성된 것이 아니랴. 시인은 욕망하기도 한다. 내 삶의 절정을 만지고 싶다고. ‘이 나이에 뭘……’ 하면서 귀찮아할 것이 아니라 멀리 숨은 술래를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시인은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는 것이고, 공든 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시인의 연륜은 삶의 지혜를 설파하는 철학자의 면모를 지니기도 한다.

손끝의 감촉 하나로 행복하다
눈썹과 패인 눈자위 속 눈망울을 만지면
이리저리 피하는 네가 있다
꼭 잡아보려 해도 피하는 너
멀리 숨은 술래를 찾아 나선다

(……)

차츰 눈과 귀가 철이 나
나와 너의 경계가 보이던 날
너는 멀고 먼 소리였다 보이지 않는 향기였다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준 미소
이제 무엇인지
내 삶의 절정을 만지고 싶다
그 고운 발가락 손가락 그리고 입술의 언어까지
―「나는 너를 만지고 싶다」 부분
이 시의 화자는 헬렌 켈러처럼 눈도 잘 안 보이고 소리도 잘 안 들리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손끝의 감촉 하나로 행복감을 느끼는 화자는 멀리 숨은 술래를 찾아 나선다. 오랜 고행은 차츰 눈과 귀에 철이 나게 하였다. 멀고 먼 소리였던 너, 보이지 않는 향기였던 너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런 연후에 화자는 일갈한다. 이제 무엇인지 내 삶의 절정을 만지고 싶다고. 삶의 절정을 만지기 위해서는 시시포스처럼 줄기차게 시도하는 끈질긴 노력이 중요한데 조옥동 시인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시종일관 그리해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시의 마지막 행 “그 고운 발가락 손가락 그리고 입술의 언어까지”에서 시인은 긴 순례를 마치고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 돌아와서 이제는 거울 앞에 앉은 누님(서정주)의 자세를 보여준다. 시인은 마침내 자기 뼈 속의 악기로 아픔과 슬픔을 조율한다. 아픔과 슬픔의 조율사인 시인은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흔적 없는 시냇물 소리 간간이 들리고
빗물 질척하게 고여 피고름같이 조려지는
희미한 옛 얼굴 떠올리는
먼지 낀 유리를 훔쳐내는 굵어진 손마디
어쩌다 어루만져 깊은 상처 보듬어
세월의 갈피 속에 접힌 아픔을
따뜻한 슬픔을
나는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흔적」 부분

세월의 갈피 속에 접힌 아픔과 따뜻한 슬픔을 만나고자 하는 시인의 소망이 나는 이뤄지리라 믿는다. 앞에서도 말했었지만 시인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아물면 딱지를 남기고, 딱지가 떨어지면 흔적(흉터)이 남는 법이다. 그 흔적이 상처뿐인 영광일지라도 시인이기에 다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갈피 속에 접힌 아픔과 따뜻한 슬픔을 만나기 위해 시를 쓰고 있는 조옥동 시인의 제2시집에 대한 감상문 쓰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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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의 한 구절이 툭 영혼의 옆구리를 치고...." 홍승주 2007.07.07 716
5 꿈의ph 7.0 구역 (푸른사상사 발행 2007년 "오늘의 좋은 시" 에 선정)----조옥동 이승하 2007.05.22 704
» "세월의 갈피 속에 접힌 아픔을 만나기 위하여"(제2시집 해설문) 이승하 2007.05.22 1161
3 조옥동의 <내 뼈 속에는 악기가> 뉴욕중앙일보[시와의 대화] 신지혜 2006.03.26 926
2 나는 당신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믿습니다.-한국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3-4월호,2006년- 나태주 2006.03.19 916
1 조옥동 시인의 시세계 <인생과 자연의 파수꾼>--한국' 창조문학 '54호 최선호 2005.04.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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