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나태주

2009.05.16 08:08

조옥동 조회 수:417 추천:35

사랑

                                  나 태 주


1


오늘도 교장선생님은 몽당연필 한 개를 주웠습니다.


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교문 앞에서 쓰레기 몇 개를 주워 쓰레기장에 버리러 갔다가


쓰레기장 옆에서 주운 몽당연필입니다.


몽당연필은 반쯤이나 몸이 흙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2


<누가 이렇게 아까운 연필을 버렸는지 모르겠구나.>


교장선생님은 몽당연필을 수돗물로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몽당연필의 몸에 묻어있던 흙이며 지저분한 찌꺼기들이 씻겨나갔습니다.


비로소 몽당연필의 몸 색깔이 나왔습니다.


깜장색 몽당연필입니다.  


그러나 몽당연필의 몸에는 여러 군데에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3


교장선생님은 몽당연필을 들고 교장실로 갔습니다.


연필 깎는 칼을 꺼내어 부러진 심을 잘 깎아주었습니다.


머리부분에 나 있는 찌그러진 곳도 잘 다듬어주었습니다.


<이젠 됐다. 두었다가 볼펜 깍지에 꽂아서 쓰면 아주 좋겠구나.>






4


교장선생님은 빙그레 웃음 띈 얼굴로 몽당연필을 내려다보면서 책상 서랍 속에서 필통 하나를 꺼냈습니다.


낡고 색이 바랜 필통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오래 동안 가지고 있던 필통입니다.






5  


<딸그닥>


필통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필통 속에는 이미 많은 몽당연필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동안 학교 안 구석구석에 버려진 것들을 주워 가지고 온 몽당연필들입니다.


몽당연필들은 색깔도 여러 가지입니다.


파랑연필.


빨강연필.


노랑연필.


보라연필.


그 가운데엔 머리에 지우개 모자를 쓴 꼭지연필도 한 개 있습니다.  






6


<또르륵>


교장선생님은 조금 전에 주워온 깜장색 몽당연필을 필통 속에 굴려 넣습니다.


<이게 누구야? 깜장색 촌놈이잖아?>


빨강연필이 투덜댔습니다.


<이상한 냄새도 나는 걸>


<그러게 말이야. 쓰레기장 냄새야.>


노랑연필과 보라연필이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자리가 비좁단 말이야. 저리로 가. 저리로 가란 말이야.>


파랑연필도 불평을 했습니다.


연필들의 구박 소리를 들으며 깜장연필은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7


그 때였습니다.


<얘들아, 그러지 말아. 우리도 처음엔 몸에서 냄새가 나는 몽당연필이었어. 그리고 모두 아이들이 쓰다가 버린 것을 교장선생님이 주워 온 거야.>


몽당연필들은 꼭지연필이 하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8


교장선생님한테도 어린 아이 때가 있었습니다.


키가 작고 몸집도 조그만 아이.


눈이 크고 입술이 붉고 코와 귀가 예쁜 곱슬머리 아이.


외할머니와 둘이서 사는 아이였습니다.  


언덕바지 위에 서 있는 방 두 칸에 부엌이 한 칸, 오막살이 초가집이었습니다.


대문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9


아이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연필이 너무 짧아져서 글씨를 쓸 수가 없어요. 연필 하나만 사 주세요.>


<오냐. 내 연필을 사주마. 그런데 돈이 없어서 어쩌면 좋지? 옳거니. 달걀 하나를 줄 테니  가게에 가지고 가서 연필과 바꾸어 오도록 하려무나.>


할머니는 아이의 손에 달걀 하나를 쥐어주셨습니다.


달걀은 새하얗고 둥글고 사랑스러웠습니다.






10


<얼른 가게에 가 연필과 바꾸어 달래야지.>


아이는 좋아서 달걀을 들고 언덕길을 뛰어 내려갑니다.


할머니가 멀리서 뛰어가는 아이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아가야, 넘어질라. 땅바닥을 보면서 천천히 가려무나.>






11


<아이쿠!>


아이는 언덕길을 거의 다 내려와 큰길로 들어서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렸습니다.  


<내 달걀… 내 달걀…>


아이의 손에서 달걀이 먼저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깨져버렸습니다.


아이도 그 옆에 넘어졌습니다.






12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할머니가 멀리서 보고 계셨습니다.


<저걸 어쩌나! 울 애기가 다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


아이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 내 달걀이 떨어져 깨졌어요. 넘어져서 그랬어요.>


<괜찮다, 아가야. 어디 다친 데는 없니?>


할머니는 다시 부엌의 닭장으로 가 달걀 하나를 꺼내 오셨습니다.


금새 암탉이 낳은 달걀입니다.






13


달걀은 먼저 것처럼 새하얗고 둥글고 예쁩니다.


그러나 이번 것은 따뜻한 느낌이 드는 달걀입니다.


암탉이 조금 전에 낳은 달걀이라서 그렇습니다.


아이는 달걀을 두 손에 조심스럽게 받아 쥐었습니다.


그 둥글고 새하얗고 따뜻한 달걀이 할머니의 마음이라고 생각해봅니다.






14


<왜 교장선생님은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주워왔을까?>


교장선생님이 아이 때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꼭지연필이 말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아이들도 우리를 쓰다가 버렸는데 말이야.>


빨강연필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마도 옛날 일을 잊지 않는 분이라서 그럴 거야.>


<아니야.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라서 그럴 거야.>


노랑연필과 파랑연필이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15


나이 많은 교장선생님에게 어린아이 때가 있었던 것처럼 연필들에게도 어린아이 때가 있었습니다.


연필이 되기 전에 숲 속에서 나무로 살았을 때입니다.


아기나무이기도 했고 어른나무이기도 했습니다.


숲 속에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햇빛과 이슬이 친구였고 바람과 구름이 친구였습니다.


산새며 벌레들도 좋은 이웃이었습니다.  


그 많은 친구와 이웃들과 들과 함께 나무들은 숲 속에서 꽃을 피우기도 하고 열매를 매달며 살았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노래하며 춤을 추며 행복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어느 날, 사람들한테 붙잡혀 와 연필이 되고 만 것입니다.






16


<어쩌면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서 그럴 거야.>


보라 연필은 밝고도 환한 숲 속의 햇빛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많은 분이라서 그럴 거야.>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던 나무의 마음이 되어 깜장연필이 말했습니다.


<그럴 지도 모르지. 교장선생님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분이라서 그럴 지도 몰라.>


꼭지연필은 제가 아기나무였을 때 할아버지나무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을 희미하게 되살리면서 말했습니다.      






17


<그래 그래. 너희들 말이 다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다.


사랑은 오래된 것을 잊지 않는 마음이란다.


처음 가졌던 마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키는 마음이기도 하지.  


그리고 작은 것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는 따뜻한 마음이기도 하단다.


그리고... 그리고 말야.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란 사람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거란다.>






18


교장선생님은 몽당연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기분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행복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 날은 모처럼 몽당연필들도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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