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전나무 숲에 들다

2005.10.25 14:08

박정순 조회 수:39

      
월정사 전나무 숲에 들다


‘밖에서 청 딱다구리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가을이 깊어 가나 보다.’ 하고 보내준 친구의 한 줄 메시지에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바라본다.   며칠 전 다녀온 오대산 월정사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하늘.  아직 내 머리 속에서는 한국의 명산을 다녀온 그 기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이른 새벽,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 월정사에 도착하니 산사는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택시 기사의 터무니 없이 부르는 요금에 기분이 씁쓸했지만 먼 길을 달려온 이상, 그로 인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침묵의 산사를 흔들고 있는 이른 새벽, 찬 공기로 손이 시려오는 가을공기가 청량 음료처럼 시원했다.

가을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노란 물감이 흘러 내리듯 그렇게 산등성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뽕나무, 갈참나무, 단풍나무, 물푸레, 머루, 칡덩쿨…. 여름내 짙은 녹음은 부드럽고 따스한 풍경이 되어 산 전체를 불 타 오르듯 는 했다.  하나의 숲이 계곡으로 구비구비 흘러가는 시냇물에 제 모습 비춰보는 곳.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하늘로 간 사람이 있다 할 만큼 황홀한 단풍이 드는 곳이 오대산이라고 한다.  

오래 된 고찰인 월정사의 내력은 신라때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의 화현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정골사리, 가사, 발우들을 얻으면서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일주문을 지나 산사를 에워 싸고 있는 듯한 전나무 숲길에 들어 섰다.  솔 향기가 코 끝에 스며드는  이 숲길은 마치  이곳이 북미의 어느 공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한국에서 보기 드문 전나무 숲 길이었다.  어느 새 어둠은 사라지고 햇살이 비치는 산 봉우리에는 환한 부처의 미소를 보는 듯 했다.  느린 걸음으로 사색에 잠겨볼 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삐 또 다른 곳을 만나는 약속이라도 있는 듯 상원사로 올라가는 큰길로 들어섰다.

자장교를 지나자, 남대 지장암으로 가는 길…. “산에 왔으니 산의 정기를 받아 가야지요.” 룸메이트인 Y사장의 옹골찬 주장에… 걸음이 더딘 나로서는 무조건 따라 갈 수 밖에.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었는지 벌써 단풍은 떨어져 길 위에 낙엽으로 뒹굴고 있었다. ‘하나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으면 나 또한 성불하지 않겠다’ 라는 서원을 세우고 중생 구도를 위해 노력했다는 자장의 설법이 저 나무들에게 미리 전달 되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열심히 걸어가던 일행 세 사람은 맨 꼴찌를 사수하며 걷는 나를 인식해서  중간 중간 걸음을 멈추고 낙엽을 주우며 기다리고 섰다.  산을 오르는 자들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듯 하여 먼저 목적지를 순회하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합류하자는 내 제의가 별로 신통치 않았는지…  목적지는 가지도 못하고 하산길로 접어 들었다.

후드득… 산새들의 울음과 날갯짓이 들릴 때마다 잎사귀가 일렁이다 이내 잠잠해진다.  움직임이 없는 정적 속에서 여기 저기 흔들림을 본다는 것은 산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발견의 즐거움이 될지도 모른다.   혹여 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이 길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려 하는 또 다른 수행 길인지도 모를 터.

간혹 전나무의 가지가 나뉘어져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두 그루의 나무로 변신해서 서 있는 나무를 보자, “저건 바로 부부 나무야”  익살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어쩌면 한 생을 살다가는 우리들 또한 저렇게 서 있는 나무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남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으며 제 자리에서 묵묵하게 살아가는 존재. 그래서 나무로 인해 우리는 마음의 풍요를 얻고 자연에 귀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지 모른다.  무념 무상을 추구하므로 서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나무는 경전이 되어 우리를 가르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려 오는 길, 함께 동행해준 Y경감님으로 인해 산길의 두려움을 잊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는 8시 부터 이어질 학술 세미나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호텔로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539 미로 백선영 2005.10.24 28
9538 뒤 란 백선영 2005.10.24 47
9537 백선영 2005.10.24 39
9536 월출봉에 걸린 6월 백선영 2005.10.24 36
9535 산 아래 산다 백선영 2005.10.24 43
9534 해질 무렵의 옛 고향 마을 권태성 2005.10.24 36
» 월정사, 전나무 숲에 들다 박정순 2005.10.25 39
9532 산사에서 박정순 2005.10.25 52
9531 메아리 유은자 2005.10.26 13
9530 나이 / 鐘波 이기윤 2005.10.27 33
9529 불안한 승객, 불안한 국민 정찬열 2005.10.27 22
9528 또또의 항변 정찬열 2005.10.27 50
9527 폭풍우 계절 / 鐘波 이기윤 2005.10.27 17
9526 詩와 삶의 홈 / 鐘波 이기윤 2005.10.27 53
9525 시인나라 / 鐘波 이기윤 2005.10.27 308
9524 강 신호 선생님, 그 큰별 노기제 2005.10.27 136
9523 고향 그리며 유은자 2005.10.28 57
9522 안녕하세요 오영근 2005.10.28 225
9521 점(點)으로 산다 김영교 2005.10.28 63
9520 동심초 / 鐘波 이기윤 2005.10.29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