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코뺑이를 아시나요

2005.11.07 15:59

정찬열 조회 수:99

                                                    
  전남 영암군 군서면 장사리. 동네 뒤로 난 산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담배 한 대참 걸어가면 만나게 되는 절벽, 쌍코뺑이를 아십니까. 끝간데 없이 넓은 영산강이 발아래 내려다보이고 해창 나루와 강 건너 갈대밭이 아스라이 굽어보이던 언덕, 시암골을 사이에 두고 절벽 둘이 코를 마주보던, 쌍코뺑이를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난 10월, 삼 십여 년 만에 쌍코뺑이를 찾아갔습니다. 스물 한 살 나이에 마지막 밟았던 그 절벽, 방황하던 젊은 시절 혼자서 캄캄한 밤을 헤매던 그 언덕을,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 찾아간 것입니다.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한 밤 중, 내 하소연을 말없이 받아주던 그 우뚝하던 소나무들은 온데 간데 없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이파리를 엎었다 뒤집었다 온 몸을 흔들며 살아 보라 살아보라고 속삭여주던 오리나무숲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무가 서있던 자리는 밭이 되고, 그 밭에서 배추가 여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언덕에 서서 강 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물 따라 하루 한 번 목포에서 해창을 오가던 여객선 '영암호'의 뱃길이었던 푸르디푸른 강은 어디로 가고, 운저리 모챙이 숭어 장어 그 팔딱거리던 생선을 품어 기르던 출렁이는 강물은 사라지고, 철 따라 뻘 밭에서 맛이랑 게를 잡아내던 아가씨들의 그 흐드러지던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자리는 농장이 되어 누렇게 익은 벼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철석이던 파도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대신 가을을 수확하는 트랙터 소리만 적막한 들판에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허수아비가 두 손을 들고 들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절벽에 서서 지난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힘들고 답답할 때면 어두운 밤에 이 언덕을 찾아와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러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 언덕은 내 아픔과 설움을 보듬고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열 일곱 살 서툰 농사꾼이 합수통을 지고 가다 언덕길에 미끄러져 똥물로 뒤범벅이 되던 날, 나를 가만히 안아준 곳은 이 언덕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뱃지를 단 친구들이 많이도 부러웠던 어느 날 혼자 걸어와 울먹였던 곳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한없이 허허로운 내 마음을 달래준 곳도 이 절벽이었습니다. 늦었지만 학교를 다녀야겠다고 결심하던 스물 한 살 설날 밤,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작심하던 그 날 밤, 바람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주며 등을 토닥여 떠밀어 나를 보내준 곳도 이 언덕이었습니다. 내 젊음의 굽이굽이에서 말없이 나를 지켜주었던 곳이 바로 이 절벽이었습니다.
   쉰 살이 훨씬 넘은 나이로 언덕에 서 있으려니, 쌍코뺑이를 떠난 다음의 세월들도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어머니가 꾸려주신 보리쌀 섞인 쌀 닷 되를 짊어지고 광주에 올라와 야간학교에 입학하던 일, 방송통신대학과의 인연, 다시금 서울에 올라가 학비를 벌어가며 대학을 다니던 시절, 미국에 건너와 남의 땅 낯선 하늘 아래 문패를 내걸고 뿌리내려 살아왔던 일, 등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습니다.  
   쌍코뺑이는 내 마음의 고향입니다. 어려운 객지생활 속에서도 이곳을 생각하면 위안이 되고 힘이 솟아났습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밀려오면 이 언덕을 떠올리면서, 이 절벽에서 내가 나에게 다짐한 약속을 되새기면서 마음을 다잡고 주먹을 꼭 쥐었습니다. 서러움에 가슴이 미어지는 날은 이 언덕을 기억해내면서 자신을 달래곤 했습니다.
   사람마다 고향이 있을 것입니다. 추억 어린 어느 산길, 후미진 단골 막걸리 집 등, 누구나 잊혀지지 않는 쌍코뺑이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전 쌍코뺑이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내 마음 속 쌍코뺑이 언덕이 내 뒤에 든든하게 서 있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면 내 등을 어루만져주고 있습니다.
                  <2005년 11월 9일자 광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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