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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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도 하얀 걸까

2013.05.07 22:34

채영선 조회 수:289 추천:83

밤에도 하얀 걸까




밤에도 그렇게 하얀 걸까

낮에나 볼 수 있으니 알 수 있어야지

게다가 멀리 있어 곰곰이 볼 수가 없어

발엔 때가 묻어 있겠지, 아니면

발을 씻으러 물가로 날아가나

거기를 보이지 않으려고 꼬리는 까만 걸까

더러운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그윽한 몸매 드러내고 싶어 나뭇가지 위에 서 있는 거지

어디서나 볼 수 있다면 신비롭지도 않을 거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먹을 것 찾기에 분주하지만

한가로운 것처럼 보이는 데는 무슨 방법이 있겠지

따로 모아놓은 것도 없을 텐데 말야

걸음걸이도 꼭 배우고 싶은 것 중 하나야

긴 부리를 느긋하게 움직이며 어딘가에 있을 먹이에게로 다가갈 때

걸어가는 다리의 굽어지는 각도와 속도

느리지도 않게, 주의 깊고 차분하게,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

가는 다리로 자빠지지도 않아

바로 그것이 너를 우아함의 극치로 만들어주는 거지

우리는 쓸데없이 바빠지고만 있어

여기저기 눈이 많아서 할금할금 눈치보며 살고 있지

신호를 따라 움직여야 해, 빨갛고 파란 불들이 하라는 대로

집안에는 신호를 보내는 불이 여러가지 있어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고, 다른 색으로 변하기도 하고

현관에서부터 불은 쉴 새 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지

편한 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할까 말까 고민할 이유가 없으니까

앞일을 내다볼 필요가 없으니까

작고 예리한 눈으로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는 모습이 너를 특별하게
만드는 걸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거야

편한 것을 버리기는 어려운 일이거든

전철 안에서 온 세계를 볼 수 있으니

땅 속으로 다니다보니 생쥐같이 살게 된 걸까

걸음을 뗄 때마다 삐지도 않고, 여유롭게 관절을 오므리고 펴는

너의 발가락이 보고 싶어

춤을 추듯 젓는 목의 아름다운 굴곡도





시집 '사랑한다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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