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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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창 앞에서

2013.05.30 01:36

채영선 조회 수:809 추천:117

부엌 창 앞에서



기다리던 비는 봄비가 아니었다.
봄비라면 가뿐한 봄 처녀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와서 목이나 축여주고 사라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할 터인데, 삼일 동안 흐린 하늘에 구름의 날개도 안 보이고 시야만 어두워진다. 가스 안전 발브 점검 안하고 외출한 것처럼 찌뿌듯한 게 꼭 몸살 나기 전조 같다.
이상기온이라더니 벌써 장마가 오는 걸까.

가장 아름다운 계절 오월의 날씨는 이게 아닌데....
새로 바꾼 전화기마저 낯설어 찾아가서 자꾸 되물어보니 매장의 젊은이에게 빈축을 사는 것 같아 슬프기 조차하다.
전화는 왜 그렇게 자주 바뀌며, 이 년도 안 되어서 왜 자꾸 마음대로 일을 안 하는지.
이래저래 봄을 타는 나의 몸은 마음 따라 무거워진다.

며칠 만에 만나는 햇빛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나이 땜에 생기는 무릎 이상도 벌써 십년은 되었으니 이유랄 것 없지만, 정원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아파트에서 뒷산 기슭의 동네 텃밭은 유일한 나의 청량음료인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주방 창문이 작은 것이다.
그래도 눈밭이 붉은 밭이 되고, 붉은 밭이 연두 밭, 연두 밭이 초록 밭이 되는 것이 신기해서 목을 조금 구브리고 내다보거나 식탁에 앉아 내다보는 게 즐거운 일이 되었다.

보얗던 파 꽃은 어느새 사라지고 언제 두꺼운 파아란 이불이 덮여있다.
눈이 답답해서 비비다보니 얼룩 진 창문 유리가 눈에 띤다.
친정 엄마 사시는 동네 가까이, 그리고 산이 있고 조금 높은 지대를 고르다보니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귀가 얇은 건지 눈이 얇은 건지 한번 보고 좋으면 그만인 나는 첫 번 와보는 이 집에 넘어가고 말았다.

자작나무 숲이 한 쪽 벽에 가득하고 식탁 앞에는 따뜻한 꽃밭, 방마다 다른 색의 벽지는 모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정적으로 좋은 것은 어두운 색으로 몰딩을 해서 가라앉은 분위기, 단 일 년을 살아도 마음이 편한 곳에 거하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종이 행주에 물을 묻혀 닦아 본다.
겨우 안쪽에 붙은 얼룩이 지워져간다, 이제 남은 건 바깥쪽인데 어떻게 하지?
굵은 비야, 내려라, 얼룩을 지워주려무나.
고추 밭이 무성해지는 것, 호박 넝쿨이 밭두렁 덮는 걸 보아야할 텐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슬비, 가랑비, 장맛비 그 살아있는 빗발의 두께를 재보아야 하는데. 빗발 뒤에서 수런거리는 텃밭의 이야기를 들어야하는데. 밤나무 숲의 밤꽃이 하루하루 조금씩 더 하얘지는 걸 놓치면 안 되는데.
여리고 고운 잔디에 가끔 보이는 자운영 흰 꽃, 수없이 옮겨 심은 탐스런 옥잠화 꽃술은 못 본다 해도 옥수수 꽃대는 놓치고 싶지 않다.

며칠 동안 이 모임 저 모임으로 바쁘다고 글이 잡히지 않는다.
보여야 할 텐데 보이지 않았다, 마음의 창에 얼룩이 묻은 탓일 게다.
부엌 창에 있는 얼룩은 내가 지우면 되지만 마음의 창에 묻은 얼룩은 어떻게 하나.

다행히도 내겐 기다릴 수 있는 또 하나의 비가 있다.
가물면 가물수록 애타게 목말라 기다릴수록 때맞추어 주시는 은혜의 단비이다.
아마 그 은혜의 단비 때문에 목마르지도 않고 시들어버리지도 않고 이제까지 버티어 왔을 것이다.
그 비로 인하여 마음의 창이 맑아지고 깨끗하게 되어 연약한 것을 아끼고 끌어안으며 더 연약해진다 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찬양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함께 나누어야 할 누리, 바꿀 수도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선물인데 이미 두껍께 앉은 얼룩을 지우려다 속살이 상하면 그 아픔을 어떻게 할까.
충분히 아프고 지쳐 있는 목숨들을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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