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현, 고시조, 나호열, 루미
2006.01.20 15:06
*** 66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김제현 (1939 - ) 「풍경」전문
올해로 경기대 정년퇴직을 앞둔 김 시인에게는 풍경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풍경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적막이 들린다고 한다. 그 고요하고 비어있는 공간에 넘치는 별빛도 보인다. 그리고 바람따라 무심히 우는 것 같은 풍경도 사실은 혼자서 울고 싶은 아픔이 있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듣는 것, 보는 것, 만지는 것은 사물의 겉모습일 뿐이다. 김 시인처럼 사물의 깊숙한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속내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마음을 닦아야 하고 얼마만한 연륜이 필요한 것일까.
*** 67
겨울날 다스한 볕을 님 계신 듸 비최고쟈
봄 미나리 살진 맛을 님에게 드리고쟈
님이야 무엇이 업스리마난 내 못 니저 하노라
작자 미상 「겨울날 다스한 볕을」 전문
<청구영언>(1728)은 고려 때부터 영조 3년까지 전래돼 오는 시조를 김천택이 엮어낸 한국 최고의 시조집이다. 그 책에 이 작품이 실려 있으니 대충 500년 전의 노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이야 미나리를 사철 맛볼 수 있지만 그 옛날은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내 묵은 김치만을 먹다가 새로 돋아난 봄 미나리를 먹을 때의 상큼함은 별미가 되었으리라. 이 시에서 님은 없는 게 없는 사람이라니 흔히 고시조에서 그렇듯 임금을 지칭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님이 누구라도 상관없다. 화자는 고귀하고 잊을 수 없는 님에게 봄 미나리 살진 맛을 드리고 싶다. '살찐'이 아니고 '살진' 맛이다. 여름의 진초록이 아닌 신록의 부드러움과 촉촉함이 느껴진다. 가난하지만 가장 좋은 것을 님에게 드리고 싶어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는 소박한 마음이 봄 미나리 살진 맛으로 다가와 입안을 가득 상큼하게 한다.
*** 68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나호열 (1953 - ) 「당신에게 말 걸기」전문
안자보레고 돌사막으로 꽃구경 간 적이 있다. 선인장들도 제각기 예쁜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못난 꽃도 없고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뻤다. 사막의 선인장들은 겨울에 내린 비를 몸 속에 저장하고 살을 태우는 햇볕과 마른 바람을 맞으며 기어이 꽃을 피워낸다. 그 꽃을 나비와 벌이, 그리고 다른 꽃들이 보아주겠지. 어렵사리 피워낸 꽃을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거울을 볼 수 없는 꽃들은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는 말을 건네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활짝 열 것이다. 봄바람에 환하게 웃는 꽃 위로 '제비'가 멋지게 날아가는 풍경이 떠오른다.
*** 69
오, 사랑이여, 그대의 크기로서
하늘에조차 맞을 수 없도다
그런데 어떻게 내 가슴에 몰래 들어와
이렇게 꼭 맞을 수 있는지
그대는 가슴 집으로 뛰어 들어와
그 위로 문을 잠가 버렸도다
나는 이 낡은 석유등의 비치는 유리가 되도다
나는 그 불빛 안의 불빛이로다
메블라나 잘라루딘 루미 (J. Rumi 1207 - 1273)「입술 없는 꽃」(이성열 역) 부분
루미는 13세기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수피스트(Sufist, 신비주의자라고 흔히 번역됨)다. 수양을 통해 자아의 소멸을 경험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6만 구가 넘는 시로 남겼다. 그 중의 일부를 이성열 시인이 「입술 없는 꽃」이란 제목 아래 번역, 책으로 펴냈다.
사랑은 너무나 커서 내 작은 가슴에 들어올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랑은 어느새 낡은 석유등같은 내 몸에 들어와 빛을 발한다. 십리 밖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누구나 그 빛을 감지할 수 있다. 사랑이 들어옴으로써 마침내 나 또한 불빛이 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진리는 다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을 생각나게 하는 시다.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김제현 (1939 - ) 「풍경」전문
올해로 경기대 정년퇴직을 앞둔 김 시인에게는 풍경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풍경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적막이 들린다고 한다. 그 고요하고 비어있는 공간에 넘치는 별빛도 보인다. 그리고 바람따라 무심히 우는 것 같은 풍경도 사실은 혼자서 울고 싶은 아픔이 있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듣는 것, 보는 것, 만지는 것은 사물의 겉모습일 뿐이다. 김 시인처럼 사물의 깊숙한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속내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마음을 닦아야 하고 얼마만한 연륜이 필요한 것일까.
*** 67
겨울날 다스한 볕을 님 계신 듸 비최고쟈
봄 미나리 살진 맛을 님에게 드리고쟈
님이야 무엇이 업스리마난 내 못 니저 하노라
작자 미상 「겨울날 다스한 볕을」 전문
<청구영언>(1728)은 고려 때부터 영조 3년까지 전래돼 오는 시조를 김천택이 엮어낸 한국 최고의 시조집이다. 그 책에 이 작품이 실려 있으니 대충 500년 전의 노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이야 미나리를 사철 맛볼 수 있지만 그 옛날은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우내 묵은 김치만을 먹다가 새로 돋아난 봄 미나리를 먹을 때의 상큼함은 별미가 되었으리라. 이 시에서 님은 없는 게 없는 사람이라니 흔히 고시조에서 그렇듯 임금을 지칭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님이 누구라도 상관없다. 화자는 고귀하고 잊을 수 없는 님에게 봄 미나리 살진 맛을 드리고 싶다. '살찐'이 아니고 '살진' 맛이다. 여름의 진초록이 아닌 신록의 부드러움과 촉촉함이 느껴진다. 가난하지만 가장 좋은 것을 님에게 드리고 싶어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는 소박한 마음이 봄 미나리 살진 맛으로 다가와 입안을 가득 상큼하게 한다.
*** 68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나호열 (1953 - ) 「당신에게 말 걸기」전문
안자보레고 돌사막으로 꽃구경 간 적이 있다. 선인장들도 제각기 예쁜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못난 꽃도 없고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뻤다. 사막의 선인장들은 겨울에 내린 비를 몸 속에 저장하고 살을 태우는 햇볕과 마른 바람을 맞으며 기어이 꽃을 피워낸다. 그 꽃을 나비와 벌이, 그리고 다른 꽃들이 보아주겠지. 어렵사리 피워낸 꽃을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거울을 볼 수 없는 꽃들은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는 말을 건네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활짝 열 것이다. 봄바람에 환하게 웃는 꽃 위로 '제비'가 멋지게 날아가는 풍경이 떠오른다.
*** 69
오, 사랑이여, 그대의 크기로서
하늘에조차 맞을 수 없도다
그런데 어떻게 내 가슴에 몰래 들어와
이렇게 꼭 맞을 수 있는지
그대는 가슴 집으로 뛰어 들어와
그 위로 문을 잠가 버렸도다
나는 이 낡은 석유등의 비치는 유리가 되도다
나는 그 불빛 안의 불빛이로다
메블라나 잘라루딘 루미 (J. Rumi 1207 - 1273)「입술 없는 꽃」(이성열 역) 부분
루미는 13세기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수피스트(Sufist, 신비주의자라고 흔히 번역됨)다. 수양을 통해 자아의 소멸을 경험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6만 구가 넘는 시로 남겼다. 그 중의 일부를 이성열 시인이 「입술 없는 꽃」이란 제목 아래 번역, 책으로 펴냈다.
사랑은 너무나 커서 내 작은 가슴에 들어올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사랑은 어느새 낡은 석유등같은 내 몸에 들어와 빛을 발한다. 십리 밖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누구나 그 빛을 감지할 수 있다. 사랑이 들어옴으로써 마침내 나 또한 불빛이 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진리는 다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을 생각나게 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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