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김금용, 박남철, 조운, 석상길

2006.01.20 15:15

김동찬 조회 수:460 추천:7

*** 71

여기서부터, ㅡ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1941 -  ) 「죽편(竹篇) 1 - 여행」전문

"좋은 시 다섯 편만 남길라요"라고 얘기했다고 하는 서정춘 시인은 다작을 하지 않는다.  그는 시 속에서 말을 아낀다. 꼭 필요한 자리에 적절한 단어나 어휘만을 골라 쓴다. 그래서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는 그의 시는 깔끔하면서도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여운을 준다. 
위의 시도 그렇다. 여기서부터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의 거리는 주욱 그어진 줄만큼 멀ㅡ다. 밤에 어디론가 가고 있는 기차를 보니 마디마디 연결돼 있는 대나무 같아 보인다. 대꽃이 피는 고향이 생각나고 그 마을은 백년이나 걸려서 가야할 곳처럼 멀리 느껴진다. 그 아득한 거리감이 고향을 더욱 그립게 만든다. 
 이 시를 조금 더 잘 맛보기 위해서는, 대나무 밭을 집집마다 갖고 있는 남도의 마을에 상식이 돼버린 "대나무는 백년만에 꽃을 피운다"는 속설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대나무 기차는 지금부터 꽃을 피우기까지 백년이 걸리는 시간 여행을 한다'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어서 시를 읽는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다.

*** 72

속절없이, 온종일 세탁기만 돌리고 또 돌린다 하얗게 속살 벗겨지는 빨래 더미 속에서 언젠가 잊고 있었던 때묻은 세상 얼룩들이 비누 거품을 비집고 피어난다 세상 얘기가 때에서 흘려지고 훔친 비밀이 땟국물로 떠오르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봉 따라 발 밑으로 쏟아지는 삶의 찌꺼지들, 양잿물에라도 삶을 걸, 바지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구겨진 상처 조각들이 뒷골을 마구 쑤시며 덤벼든다 창창한 햇살 아래 발가벗긴 채 스멀거리는 곰팡이나 때려잡을 걸, 선잠 깨워 이젠 낯설기만한 꿈들까지 송두리째 탕탕 털어 말릴까보다 태양이 흐린 백열등 알처럼 작아질 때까지

      김금용 (1953 -  ) 「세탁기」전문 

이런 시를 읽으면 시가 노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한다. 끊일 듯 끊일 듯 하면서 반복되어 이어지는 타령조의 옛 가락이 떠오른다. 이동주 시인의 시「강강술래」의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 강강술래" 하는 숨가쁜 호흡이 느껴지기도 한다. 잊고 있었던 세상의 얼룩들이, 어두운 비밀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쏟아져 나온다니 절로 신명이 난다. 온종일 돌리고 싶겠지만 세탁기만 돌리면서 시를 마칠 수야 없었으리라. 맨 마지막에서 탕탕 털어 말린다는 결구도 경쾌하다. 눈부신 빨래의 흰 빛에 태양도 흐린 백열등 알처럼 작아질 때까지 탕탕 탕탕탕... 

*** 73

그후 집사람은 낮이나 밤이나 소주만 마셔대고 잠만 자는 내 방으로 살며시 들어와서 가만히 내 발을 만져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죽었나 살았나를 점검하는 행위였으리라. 아마도 나는 속으로는 울었었겠지만, 눈물 같은 것은 도무지 흘려볼래도 나지도 않았었다.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일 때문에 밖에 나가있다가도 대낮에도 불쑥 아파트로 허겁지겁 달려들어와서 '상상도 못할 짓'을 언제든지 저지를 수 있는 한 남자의 침대에 가만히 접근하여 가만히가만히 그 발을 만져보는 한 여자......

세상에 저게 어찌 '부잣집 딸'일 것이며, 저게 어찌 대책이 있는 여자일 것이며, 
저게 어찌 무표정하지만, 그 속이 실은 청산가리 마신 남자보다도 더 녹아내리고 있지나 않을 여자였을 것이란 말인가!

                     박남철 (1953 -  ) 「부활 2제」부분 
 
"박남철 시집을 읽다 눈에 띈 긴 털 하나/모른 채 하기도, 책을 놓기도 싫었다/독서를 마칠 때까지 입에 물고 있기로 했다//소중하지 않은 것도 물고 있을 때가 있다/너의 입에 나의 입에 잠시 그렇게 머물러서/서로를 어쩌지 못한 채/시간이 가고/한 생이 가고..."(졸시, 「털」전문) 
위와 같이 박남철 시인의 실명을 거명하며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렇게 그의 시들은 독자로 하여금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솔직한 자기 고백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 74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운주 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느냐.

          조운 (1900 - ? ) 「구룡폭포」전문 

정완영 시인은 조운 시인을 "춤으로 말하자면 스텝을 아는 시인, 춤추면서 남의 발을 밟지 않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시조의 대가'가 우리의 가락이 제대로 담긴 유일한 사설시조로 이 「구룡폭포」를 꼽으며 아끼지 않은 찬사다. 말만 길게 늘어뜨린다고 다 사설시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천년을 내려온, 유장한 가락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장엄한 폭포와 세월 앞에 서면 곧잘 넋을 잃게 된다. 천척 절벽에 한 번 굴러보려 해도 몇 생을 닦아야 하는 우리들의 왜소한 존재를 느낀다. 너절한 말은 집어넣고 그냥 시나 한 구절 외어볼 밖에. 사람이 몇 겁이나 지나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 75

'여울도 자갈돌들이 있어야 
     노래를 잘 부른다'는

돌들이 노래자랑을 하는
     샛강으로 갔습니다

내게는 입 없는 여울의 노래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하도 신기해서 입이 큰 나도 돌의 
     노래를 불러야지
얼른 물 속으로 들어가서

오선지의 음표마냥 새까만
      돌 하나 집어 올렸습니다

음표를 하나 잃어버린 그날
     여울의 노래는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석상길 (1939 -  ) 「돌의 노래」전문

돌석자를 성으로 가진 때문인지 석 시인은 돌과 함께 30여년을 보냈다. 수석을 수집하고, 닦고, 전시하고, 얘기도 나누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시는 돌을 소재로 삼거나 돌을 찾으러 다니며 만난 자연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요즘은 돌이 자연 속에서 해와 별을 보고, 이슬도 맞고, 바람도 맞을 수 있도록 방생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음표가 빠져서 엉망이 되었던 여울의 노래도 이제는 원래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