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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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 아저씨 (2) ../ 홍인숙(Grace)

-아저씨는 떠나고-

연 이틀 계속되는 더위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나는 정원의 축 늘어진 꽃잎들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으로만 걱정할 뿐 정작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오늘은 태양이 뜨거워지기 전에 아침부터 서둘러 정원 구석구석에 물을 주었다.
그동안 여러가지 핑계로 잘 돌봐주지도 못했는데,
장미꽃도 색깔마다 탐스럽게 피었고, 몇 년 전 호기심으로 심었던
담장 밑의 양귀비도 저 혼자 잘 자라 어느새 진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올렸다.

과실수를 둘러보았다. 모두 대견스레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아직 어린 포도나무도 제법 보기좋게 넝쿨을 뻗었고,
복숭아나무, 체리나무, 살구나무도 파릇한 가지마다 봉긋봉긋한 열매를 달랑거린다.
감나무의 무성한 잎새들도 초록빛을 반짝이며 하늘이 쏟아내리는 맑은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싱그럽다.

정원은 어느 해와 마찬가지로 풍성히 계절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아직도 긴 침묵에서 깨어나지를 못하는 한구석의 텃밭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해마다 봄이 오면 깻잎, 상추, 오이, 가지 등.. 어린 모종을 다정히 품어 키우다
한여름 내내 고국의 향수와 함께 푸짐한 채소를 제공해주었던 텃밭이
올해는 잡초만 가득 안은 채 쓸쓸히 빈땅을 지키고 있다.

작년 여름에, 유난히 풍성하여 매일 식탁을 채우고도 여남은 병의 오이지를 담가
이웃과 나누어 먹게했던, 오이넝쿨이 있던 자리엔 빈 받침나무만 허전히 서있고
신기하게도 아직 남아있는 앙상한 고추나무 가지엔 붉게 바랜 고추 몇 개가 초라히
매달려있다.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땅의 숨소리를 듣는다. 또 가슴에 울컥 그리움이 밀려온다.


봄이면 겨우내 언 땅을 일구어
새싹을 일구던 호미 소리
들리지 않네

해마다 봄과 함께
희망으로 다가오던 그 사람
봄의 그늘이 되었네

텃밭의 검푸른 흙은
그 모습, 그 음성 그대로 간직한 채
눈부신 햇살에 젖어들고

겨우내 비맞은 삽과 호미도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네

                                    <홍인숙(Grace)>

60을 갓 넘기신 그 분, 오래 전 내 수필의 주인공인 '새봄 아저씨'께서
지난 2월 동네 마켙에 가신다며 잠시 외출하셨다가
심장마비로 차안에서 핸들을 잡으신 채 돌아가셨다.
유난히 근면하시고 건강하셔서 누구보다 장수하실 것으로 생각했던 분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그 분의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 계실 당시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내고
금방 어디선가 웃으시며 나타날 것 같다고 웅성거렸다.

나 역시 아직도 눈에 선한 아저씨의 모습과
자상했던 목소리가 그대로 남아있는 텃밭을 바라보기가 마음 아파
더위를 포함한 여러가지 핑계로 올해 정원 손질에 게으름을 피웠던 것이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결에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風磬)소리처럼
그 분의 음성, 그 분의 삽질 소리가 정원에 잔잔히 번져온다.

이젠 털고 일어나야지.
오랜 세월동안 아저씨의 손길과 땀으로 자리잡은 흙을
내 손으로라도 정성껏 일구어 텃밭을 만들어야지..
그렇게라도 해서 아저씨를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지..
지난주 교우 분께 부탁해서 얻어온 깻잎 모종을
아저씨의 호흡이 남아있는 흙을 파고 조심스레 옮겨 심으며
그 분의 정성이 담뿍 깃든 땅에 고향의 텃밭을 가꾸리라 다짐해본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
영혼구제를 묘사한 성경말씀이 너무도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아침,
오랜 세월 묵묵히 실천하신 아저씨의 이웃사랑에 감사하며
빈 텃밭이지만 정성껏 물을 주고 가꾼다.
비록 '새봄 아저씨'는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그 분이 일구어 주시던 흙은 그분의 영혼을 소중히 간직한 채
앞으로도 해마다 캘리포니아의 하늘아래서 고국의 채소를 피워 올릴 것이다.


('새봄 아저씨'를 신문에 발표하고 원고를 전해드렸을 때
겸손과, 수줍음으로 어쩔줄 모르시던 아저씨,
그 분의 영전에 '새봄 아저씨 2'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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