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시인의 하루
2006.03.25 13:04
무명 시인의 하루
홍인숙(그레이스)
프리즘을 뚫고 나온 햇살이
영롱한 빛으로 내리는 정오의 창가에서,
무성한 풀숲에 숨어있는 네 잎 클로버처럼
수많은 언어 중 꽁꽁 숨어있는 나의 언어를 찾는다.
미셀 투르니어는
신의 창조론에 힘입어 말을 글보다 앞세웠고,
플로베르는 목소리 높여
자신의 서한문을 낭송으로 먼저 세상에 알렸다.
루이 라벨르는 동물의 무언과
신의 침묵의 중간을 말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말의 기록인 글'‘글의 전파인 말’이라는,
말과 글의 숙명적 상관관계와 공생 속에서
난 나의 어눌한 말보다는 마음에 꼭 드는
낱말 하나 만나기 위해 숲의 미로를 걷는다.
회색의 꼬리로 드넓은 하늘을 파고드는 구름처럼,
한 방울의 투신으로 블랙커피 진액 속에
재빨리 자신을 융해시키는 뽀얀 밀크처럼,
내 안에 살랑살랑 들어와 전율시키는
가슴 설레는 낱말 하나 만나면
조심조심 관념의 먼지를 털어내고
토닥토닥 고운 흙에 묻어 정성들여 싹을 틔운다.
저마다 말을 거부한채
신비로운 세계로 얼굴을 묻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말보다 글을 택한 시인이란 굴레가
더 이상 멍에로 다가오지 않는 날,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말을 곱게 받아
여름밤하늘 은하수처럼 눈부시게 안착시킨
마르셀 프루스트의 반짝거리는 글숲에서
내 사랑하는 글로 외쳐본다.
“마르셀 프루스트여.
당신의 숲에서 나는 행복한 시인입니다.”
(햇살 맑은 날, 도서관에서 글을 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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