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모종을 옮겨 심으며

2006.05.11 05:44

정찬열 조회 수:50

  비가 내렸다. 땅이 촉촉할 때 고추 모종을 옮겨 심고자 원예상회에 들려 고추모 대여섯개를 사왔다.  
  집 뒷뜰 자그마한 텃밭에 모종을 옮겨 심으면서 내 어릴적 고추밭을 일구던 날이 문득 떠 올랐다. 중학을 졸업한 후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처음 시작하던 해였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온 다음 날이였다. 고추밭에 씨를 뿌리려면 밭을 갈아엎고 흙을 고른다음 분뇨를 주고 퇴비를 후북히 뿌려주는게 일의 순서였다.
  그때는 농로가 정비되지 않아 논 밭에 거름을 나르고 수확한 작물을 집으로 들여올 때 지게가 중요한 운반 수단이었다. 농사 경험이 없던 나는 지게질이 서툴렀다. 지게가 등에 달라붙지 않고 몸과 지게가 따로 놀았다. 퇴비는 바작에 적당한 분량으로 나누어 내 힘에 맞게 져 나를 수 있었지만 분뇨를 퍼 나르는 게 문제였다.  
  합수통을 이웃 당숙집에서 빌려왔다. 나무로 둥그렇게 만든 똥통을 빌려주면서, 당숙은 상머슴이 하는 일을 네가 할 수 있겠느냐며 가득 퍼 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렇지 않으면 출렁거려 지게를 지고 걸어갈 수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난생 처음 합수통에 분뇨를 퍼 담아 지게에 실었는데 일어서기가 힘들만큼 무거웠다. 나는 아직 덜 여문 농사꾼이었다. 작대기로 버티며 간신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지게가 앞뒤로 흔들거렸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조심조심 한 발자욱씩 걸어나가 논두렁을 건너 강두메 밭 머리 가까이 왔다. 이제 나즈막한 잔등 하나만 오르면 바로 고추밭이다.
  쉼바탕에서 지게를 내려 잠깐 숨을 돌렸다. 조심스럽게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토언덕은 아직 물기를 머금어 미끄러웠다. 잔등을 반쯤 올라왔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중심이 흔들렸다. 합수통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대로 다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몇 발자욱을 더 옮기는 순간 쭉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중심을 잃고 지게가 기우뚱 하면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합수통은 굴러 떨어져 박살이 나고 오물은 언덕을 뒤덮고 흘러내렸다. 냄새가 온 벌판에 진동했다.  
  오물로 범벅이 된 몸을 들샘에서 씻었다. 몸도 마음도 춥고 떨렸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어미니가 데워준 물로 냄새나는 몸을 다시 닦아내면서 소리죽여 울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똥통이나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다니. 서러웠다. 그길로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밤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산길을 혼자 걸었다. 보름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산 아래 보리밭이 질펀하게 펼쳐있었고, 바람이 보리를 흔들며 지나가자 보리밭은 물결이 되어 출렁거렸다. 달빛 아래 일렁이는 보리밭은 금빛 바다였다.
  산을 내려와 밭고랑 따라 보리밭 사이를 거닐며 자세히 보니 '보리 모가지'가 두툼해져 있었다. 지난 겨울 추위에 들뜬 흙을 꽁꽁 밟아주었는데 어느새 여물채비를 하고있다. 혹한을 이겨내며 묵묵히 준비를 하더니 저렇게 의연하게 제 몫을 다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참자. 그리고 기다리자. 병중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교육자인 아버지를 따라 농사가 무언지도 모르며 살아온 어머니에게 이렇게도 힘든 농사일을 떠넘기고 혼자 떠날 수는 없는 일이아닌가.
  고추모를 옮겨심는데 언제 왔는지 아들녀석이 곁에 서 있다. 녀석이 아비의 속마음을 짐작이나 할른지 모르겠다. 아슴한 세월 저편의 일이지만, 그 날 달빛아래 출렁이던 보리밭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06년 4월 26일자 광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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