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비아 빙하에서

2006.06.21 05:18

유봉희 조회 수:21 추천:1


유봉희 - [콜럼비아 빙하에서]




















콜럼비아 빙하에서
유 봉 희





눈시린 빙원,

설상차를 타고 빙하에 오른다

한참 오르다보니 갈라진 빙면에 옥색 물이 들어 있다

저것은 만년의 잠에서 깨어나는 빙하의 눈,

물 한 방울, 공기 한 줌도 순결하여

시간도 천천히 걸어다닐 때 그 모습,

저 시야에 들면 은유로만 서던 시간이

저마다 싹을 티우고

손 시리던 약속도 다시 따뜻해질 것 같은,

지금도 저런 눈으로 잠 깨는 사람 어딘가 있어

우리 별이 녹슬지 않을 것이다



빙하에 선다

칼바람 코트 속 헤집고 들어와 몸을 들어올린다

순간 발밑이 움직이는 것 같다

저 계곡을 마모하며 내려오는 만년의 발걸음,

누가 보았을까

다만 빙하가 운반한 퇴적물만이 옆에 쌓여

언덕을 오르고 있다

높은 곳에 서면 높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흰 눈 덮인 평원인 이 빙하가

저 산과 저 계곡을 조각한 손이라니!

내가 서 있는 이 벌판의 빙하도

지금 보이지 않게 손을 움직이며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녹아서

언젠가는 태평양 대서양으로 흘러 들었다가

강원도 속초 바닷가 어디쯤 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녀의 손녀,

그녀의 손등을 간지러 줄 것인가



빙하 위를 걷다가 갈라진 틈을 만난다

측면 잔재에서 돌 하나 집어 아래로 던져본다

소리가 없다, 깊이를 알 수 없다

저 안은 다만 허공이 천년의 침묵을 안고 있는지

혹은 밀월의 시간이 여린 코를 골며

만년 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긴 여로에 깊은 상처 하나 품고

치유되기 기다리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지




    미궁에 햇볕 들 날 멀었을까

    그러나 깨어나서

    차가운 청수로

    우리 별에 수혈의 바늘을 꽂아줄 것이다.














유봉희 제 1 詩集 소금 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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