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되는 사람

2006.10.24 16:00

정찬열 조회 수:48 추천:1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설문조사에 많은 학생이 이순신 장군을 꼽았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런데 이곳 한국 대학생들이 모인 어느 집회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부모님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닮고 싶은 사람을 묻는 설문에서도 부모님을 꼽은 사람이 많았다. 이민 1세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다. 위인전을 읽으면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미래를 꿈꾼다.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일 수도 있고, 부모님을 비롯한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인생에 길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몇 분의 얼굴과 함께 종학이 형님이 생각난다.
  종학이 성님. 내 친구의 형이기도 한 그는 100여호 남짓 되는 시골마을.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아 읍내까지 20리길을 걸어 다녀야 했던 오지인 우리 고향동네 형님이다.
  그 시절, 나는 중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며 갈 길 몰라 방황하던 어느 날. 개똥벌레가 깜깜한 밤하늘에 푸른빛으로 길을 만들어 날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뒷등 비석거리에서 나는 형하고 나란히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월출산 넘어 떠 오른 보름달이 우리를 환히 비추어 주었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형은 광주로 유학을 갔다. 힘든 가정형편에 건강까지 좋지 않아 휴학을 하면서도 그는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후, 간부후보를 지원하여 군 장교가 되었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마을에 처음 왔을 때의 눈부신 형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형은 나에게 ‘학교에 가야한다’ 고, 그 길을 따라가노라면 여러 갈래의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몸소 가르쳐 주었다. 나는 4년 동안의 농사일을 접고 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그 후, 형이 고향마을에 버스 노선을 터놓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회사를 설립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고향을 위해 몇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미국에 건너온 후론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느 날 뜬금없이 형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찬열인가, 나 종학이네.” “아니, 장사리 종학이 성님이시라고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년 넘게 만나지 못했던 형님이 이곳 LA에서 전화를 걸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호롱불 밝히던 고향마을의 성님을 미국에서 만났다. 반갑고도 감격적인 해우였다.
종학이 성님. 그는 이 시대의 평범한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자그마한 회사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꿋꿋하게 내일을 가꾸어 나가는 사람이며, 어려운 이웃과 사랑을 나눌 줄 아는 넉넉한 사람이다.
  설문조사에서 서울의 대학생들이 이순신 장군을 선호한 이유야 알겠지만, 모두가 이순신이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가진 보통사람이 많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부모님을 꼽았던 자식들에겐 부모가 이미 그들의 길이 되고 있듯이, 우리 마을 종학이 형님이 나의 길이 되었듯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길이 될 수 있다.  내가 누군가의 길이 된다는 게 두려운 일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의 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10월 25일 광주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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