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解寃)
2007.01.17 16:15
대학 1학년 방학 때 친구들과 설악산을 갔었다. 3박 4일 야영을 하며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마지막 날 소청에서 희운각으로 내려서는 가파른 길에서, 산장 주변에 쳐진 형형색색의 텐트를 보았다. 그건 산중에 무수히 피어 난 꽃이었다. 그리고 희망이었다. 하산을 끝내고 배낭을 보니 쌀이 한 말 가까이 남았다.
사회에 진출하여 남들처럼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살아 온 길을 돌아보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건널 수없는 바다가 있었고 나는 섬이었다. 비울 수 있다면 버리겠으나 그 방법을 몰랐다. 아니, 나는 말로만 비우고 싶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 모든 것에 집착한 게 분명했다. 마치 설악산에서 어깨를 짓누르던 쌀의 무게처럼
다시 무작정 길을 떠났다.
잘 알지 못했던 히말라야 안나프르나 산록을 걷기로 했다. 생전처음 경험하는 고도를 올리며 육신은 누더기처럼 변했지만 정신은 명료해졌다. 촐라패스, 오천 삼백 미터 고개를 넘으며 바라 본 하얀 침봉들은 섬이 되었다. 잉크 빛 하늘에 붙박이처럼 떠있는 하얀 섬들.
그 사이 적응이 된 걸까? 무수히 솟은 빙탑과 번들거리는 결빙이 이젠 무섭지 않다. 두려움 대신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들이 되었다. 무엇이 나를 이리로 오게 하였나. 극한까지 밀어 붙이려는 내 속의 아우성은 무엇이었나.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삶의 관성에 지친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살아 왔던 세월에 대한 반란이었던가.
그렇다. 두려운 것은, 실체가 보이지 않기에 생기는 두려움 그 자체 일뿐이다. 삶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들은 상처투성이였다. 자고, 깨고, 걷는 안나프르나 트레킹 중 살아오며 받았던 상처들이 되 살아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들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막막한 하늘과 산 사이에서, 스스로 깨달은 것은 해원(解寃)이었다. 그리고 용서였다. 그렇게 내 속으로 들어 온 산은 위대했다.
그런 느낌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하찮은 상실감은 기실 얼마나 작은 것들인가. 자연은 저 스스로 그러한데 사람만 특별 할 수는 없다. 그런 각성을 준, 산에 감사한다.
이제 시작이다. 부처님의 고향 네팔에서 받은 각성이 흐트러지지 않으려 시작한 문학도, 내 속을 떠도는 많은 말들이 소설로 환치 되는 작업도. 따지고 보면,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나도 오래 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글 속에 내 생각과 상상력을 녹여, 내가 꿈꾸는 세상을 창조한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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