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비로암

2007.01.17 16:22

신영철 조회 수:45 추천:1

                              오대산에서 만난 사람

                                                      글. 신영철(소설가)  

  동지(冬至) 역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절기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불렀다. 일 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는, 반대로 이 시점을 기준으로 낮의 길이가 점차 증가 된다는 의미도 된다.   작년 동지에 오대산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는 장편소설을 쓴다고 거의 은둔하다시피 세상과 격리되어 있었다. 징그러운 원고와 끝이 안 보이는 긴- 씨름을 하던 때였다.
  “동지 팥죽 먹으러 오세요.”
  전화가 그렇게 반가 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끝이 안 보이는 일에 스스로 지쳐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전화가 고마웟던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떠 오른 맑은 얼굴 때문이었다. 오대산 비로암에 계시는 정안(淨岸)주지 스님이었다.

  서울을 벗어나 영동 고속도로서 보이는 산야는,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로 흐려있었다. 눈(雪)은 고사하고 비라도 한바탕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그러나 그것은 게으르고, 한 단면만 보는 내 눈이 준 착각이었다.   강원도 도계를 지나 잘 정비된 고속도로 터널을 빠져나가자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치악산 줄기가 분명한 준령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산줄기 흑백의 콘트라스트는 지금이 겨울임을 일깨워 주었다. 겨울은 역시 눈이 있어야 한다. 먼 빛, 하얀 눈 풍년인 산은 그윽했고 조용했으며 아름다웠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도입부에서의 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눈(雪)이다. 눈에 덮인 작은 온천 마을의 분위기는 고요로움이다. 그렇게 눈은, 작품 속에 환상과 청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국 속으로 들어 선 그런 느낌은 나에게도 감정이입이 되어왔다. 그런 그윽한 느낌은 오대산 너른 품에 안겨 있는 월정사 들머리 전나무 숲길까지 이어졌다. 도로는 제설이 되어 있음에도 미끄러웠다. 내린 눈의 무게에 처져 있는 적송 가지와, 줄기 한쪽으로만 묻어 있는 하얀 눈이 새삼스럽다. 월정사를 휘 감아 돌며 침잠한 계곡 물은 얼어 있었고, 얼음 틈으로 옥 색감의 물이 보였다. 하얀 눈에 점령당한 계곡은 완벽한 수묵산수화였다.      

지장암(地藏庵)은 월정사 말사였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수행을 하는, 북방 최초의 기린선원(麒麟禪院)선원이 있다. 정안스님은 지장암 불사를 일으키고 선원을 만든 이곳의 도감(都監, 암자를 책임진 주지스님)이었다. 지금은 단아하고도 웅장한 요사채들이 많지만, 정안 스님이 처음 계를 이곳에서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거의 폐허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람하면서도 단아한 가람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반듯한 지장암이 정안 스님의 울력으로 이루어 놓은 도량이라는 걸 안다. 스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채마밭을 가꾸고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암자의 공사를 지휘 한다. 일중독이라고 불릴 만큼 늘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맑은 인상과 밝은 웃음이 천상 어울리는 여여로운 비구니스님이었다. 대중이나 신도, 누구에게나 넉넉한 편안한 마음 나누기는 그녀의 오랜 수행에서 나왔을 것이다.

  “우선 팥죽을 드시고 난 후 차 한 잔 하지요.”
  스님이 이끄는 대로 후원에서 팥죽을 먹었다. 전통적으로 이날은 팥죽 먹는 날이다. 이 땅의 조상들은 팥죽이 액(厄)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팥의 붉은 색은 재앙과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僻邪)의 색이었기에 그런 관습이 생겼을 터였다. 한 해의 절기를 모두 마무리하는 이 날, 나도 그런 잡스런 것들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과 차 한 잔 나누고 나면, 나는 내쳐 오대산 눈을 헤치며 비로봉을 오를 것이다.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눈 때문에 정상을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못 가면 또 어떨까.
  식사를 끝내고 주지 스님 방으로 갔다. 스님은 맑게 우려 낸 녹차를 내 놓았다.

  “눈이 깊어 오르는 산을 사람이 없어요. 오늘은 그만 두세요.”
  “해 보지도 않고 그만 둔다면 억울해서 어쩌지요. 시도만 해 볼게요.”
  스님과 갑장이라는 생각이 나를 편하게 한 걸까. 웃는 스님의 미소가 천진스럽다.
  “높은 곳에 서면 세상이 더 잘 보이기라도 합디까?”
  “글쎄요. 그럴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닌 듯싶더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히말라야다 뭐다 산을 헤매고 있어요?”
  말이 막힌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느냐’라는 질문은 선문답이 분명 할 터였다.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구구한 군더더기 말이 이곳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정상에서 보는 실상보다, 그곳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서 본 형상(形象)없는 상(像)을 본 것도 같습니다. 물론 그게 뭔지 아직도 모르지만 요. 하하.”
  스님이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치더니 다시 차를 따른다.  

  중학 시절, 오대산에 수학여행을 왔던 인연이 막중 했던가. 그 인연으로 1971년, 마침내 이곳에서 삭발을 했다. 당시 지장암은 쇠락한 절집에 불과했다. 암자에, 대중이라고는 노스님과 계를 준 은사 스님 두 분뿐이었다. 그 후 정안스님은 운문사 강원, 중앙승가대 복지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전라도 백양사 천진암 주지 소임을 맡는다. 일과 불법은 동의어라는 스님의 신념은 천진암을 호남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백암선원으로 거듭 나게 한다. 은사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으로 지장암으로 돌아와 일 년여를 살던 스님은 다시 길을 나선다. 선원을 돌며 공부를 하던 정안 스님은 연어처럼 지장암 암주로 회귀하여 지금의 불사를 이르킨 것이다.

  “도인(道人)이 따로 없어요. 이번 천도재에서 그걸 알았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다 기어이 코가 매워졌다. 부처의 말씀도 아니고, 절 집 이야기도 아니었다. 신도 중 실제로 있었던 아흔 먹은 촌로 부인의 천도재에 얽힌 이야기였다.
  “구 한 말 마지막 내시로 궁중에 속해 있던 어르신이었습니다. 그 노인네를 보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좋은 인연이 되어 우리 선원 수좌들과 가능한 도우려 하고 있지요.”
  내시라면 부인이 필요 없을 터인데 이건 도 무슨 인연인가. 정안 스님을 또 다른 깨우침을 준 그 노인의 부인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언제 기억해 낼 것이다. 자신이 도인인줄 모르고 살고 있는, 도인이 도인이라고 부르는, 절집 아래 사하촌의 아흔 살 먹은 홀아비의 이야기를.

  현의 울림은 공감이고 공명이다. 나는 기꺼이 스님의 울림에 공명하는 공명판이 되었다. 주지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고, 더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산을 오르려면 이제 일어서야 할 때다. 만류하는 손짓을 애써 무시하고 상원사를 향하여 눈길을 나섰다. 제설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상원사 가는 길은 너무 미끄러웠다. 코끝이 찬 공기로 얼얼했다. 그러나 그런 추위가 좋았다. 문득, '나는 추위도 조선 추위가 좋다'라는 정지용님 산문 한 구절이 생각난다. 찬 공기는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난분분 내리는 눈 속 적막강산을 가는 느낌이 좋다. 키 작은 댓잎의 푸르름은 눈 속에서도 그 청정함을 잃지 않고 있다. 눈꽃을 피워 낸 소나무 가지는 그 무게에 눌린 듯 축축 처져 있다. 환장하도록 아름다운 설경도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른 오름 짓이 시작 되는 상원사에 겨우 도착했다. 산 속 서늘한 대기 속에서 내 몸을 구성한 세포들은 아우성치며 즐겁게 일어서고 있었으나 결국 거기까지였다. 돌아서도 후회는 없다. 목적한 비로봉을 꼭 오르겠다는 것이 욕심인 바에야, 설국을 즐긴들 그게 또 어떨까. 엉금엉금 기다 시피 다시 지장암으로 돌아왔다.

  “그럴 줄 알았어요. 중간에서 돌아오실 줄.”
  “그래도 상원사 부처님과 동종은 뵙고 왔습니다.”
  스님은 국화 꽃 차를 우렸다. 작은 국화가 물을 만나자 꽃잎을 연다. 어느 사이 신도들이 많이 올라왔다. 정안 스님은 수좌들이 공부하는 선방을 외호(外護)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신도들의 고단한 마음을 아우르는 일 역시,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초하루와 지장재일 말고도, 한 달에 한 번, 두 번째 일요일에 가족 법회를 갖는다. 스님의 법문은 알아듣기 쉬워 좋다. 물론 가족 법회이니까 상대의 수준에 맞추겠지만 사람답게 살라는 말로 요약 된다. 공부 하지 않으면 이해 할 수없는 심오한 불법이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금언이랄까, 그런 것이다. 대덕 고승의 오묘한 고담준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런 쉬운 법문을 들으려 전국에서 신도들이 지장암으로 모여 든다.

  정안스님은 국화차를 앞에 놓고 ‘참 나를 찾는 길'이, 말 그대로 구도(求道)라고 말했다. 어렵게 생각 할 것 하나도 없다고 눈 맑은 주지 스님은 그렇게 말했다. 입도 때 스물 한 살의 풋풋했던 아름다움이 삼십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아직 남아 있음은 산중 한가한 생활 덕일까.

  쉴 새 없이 ‘스님 계십니까.’ 찾는 신도들 때문에 정안 스님을 놓아 주어야 했다. 문밖을 나서니 지장암 대웅전 기와 맞배지붕 처마 끝에, 고드름이 줄지어 키를 키우고 있었다. 고드름 끝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달려있다. 처마 끝에 서서 지붕의 눈이 고드름이 되는 과정을, 그 고드름 뾰족한 끝에 달린 물방울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물이 눈이 되고 고드름이 되다가 다시 물로 환원되는 윤회를 눈으로 본다. 그러고 보면 지장암이란 이름은 눈(雪)이었다. 아니 고드름이었다. 아니 물(水)이었다.  

정안 스님이 주석한 이 암자의 이름 주인공,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누구인가. 석가여래의 인도로 지옥세계를 구경하고는, 그 고통스러워하는 중생들의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지장보살은 결심한다. '죄과로 인해 고통 받는 육도중생들을 모두 해탈케 한 연후에 성불하겠노라'는 원을 세운다. 지옥으로 가려는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것이, 지장보살의 대원이다. 그리하여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이라 부른다던가.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위대한 힘을 저장하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지장암이다. 정안 스님 역시,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부처님이 있다고 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애초에 물이었다. 그것이 현상적으로는, 눈으로도 바뀌고 얼음으로도 바뀌지만, 그 허울은 소멸되고 본래 참 면목인 물로 환치시킨다. 본래의 자리로 돌리려는 그게 지장보살의 서원이 아닐까.

스님의 다실(茶室) 창 밖 뜰에선, 동안거 중인 비구니들이 선방에서 나와 포행(匍行)을 하고 있다. 눈 덮인 뜰을 입승스님 따라, 양 팔을 크게 휘두르며 씩씩하게 걷고 있다. 그이들이 내 품는 입김이 하얗게 번진다. 볼 말간 비구니들 구도의 길이 이렇게 씩씩할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포행이 끝나면 다음 시간 경직된 근육을 풀 포행 때까지 다시 면벽(面壁)이 시작 될 것이다. 말을 잊고, 생각을 잊고, 나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그 면벽은, 그러나 결코 쉬운 길이 아닐 것이다. 피 흘리는 집중이고, 틈새를 파고드는 마구니들과의 끝없는 전쟁이다. 그런 공부는 백척간두에 선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 어느 상황에서나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마음자리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혹은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찾으려는 구도자들이 부럽다. 그렇게 피 흘리며 젊은 수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사사무애(事事無碍)다. 쉽게 말하자면 한 생 사는데 '걸림이 없다', 라는 말이다. 물 흐르듯 걸림이 없이 산다는 것이야말로 도(道)의 이상 아닌가. 그러나 그것에 이르는 마음을 얻기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불교를 미워 할 수 없는 이치가 있다. 다른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그런 귀결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알고, 깨우치고, 다스려 스스로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만 있다면 함께 어울려 살아도 서로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사사무애가 아닌가.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지옥 천당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여각각의 모양 모양이 모두 참된 진리의 모습들이라서서로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도 받지도 않고 온 법계에 두루 존재함이라.

  불교의 뿌리가 되는 인도 철학에서는, ‘인드라의 그물’이라는 말이 있다. 사바세계의 실상은 씨줄과 날줄로 얽혀있고 그 이음새마다 구슬이 있는데, 그 구슬은 서로 비추고 비추어지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因)과 저것(緣)이 소통하므로 존재한다는 말이겠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론 이다. 그 결론이 내가 언감생심 도달하려 했던 생각이다. 만약 내가 마음을 볼 수 있어 '나'를 관조(觀照) 할 수 있다면 난 좀 더 세상에 감사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에워싼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보낼 수 있겠다. 그리고 더불어 같이 가는 세월에 대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이제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내년에도 북 많이 짓고 다시 만나요.”
  법당 끝 축대에 서서 스님이 합장을 했다. 맞배지붕에 처마에 달린 고드름에서는 그때도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장암을 에두른 산과 숲이 눈 속에 포근했다. 절을 나서며 바라 본, 눈 덮인 산중 겨울 풍경이 그러하였다.                 -끝. 원고 3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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