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산 시선집에 붙여

2007.02.08 13:02

신영철 조회 수:58 추천:1

발문

                              권경업의 시는 힘이 세다

                                - 산 시선집에 부쳐 -

                                                          신영철(소설가. 산악인)

  시(詩)가 힘이 세다?
  잎 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운, 시인의 여린 감성으로 쓴 시가 힘이 세다는 반어법은 일견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권 시인의 시는 힘이 세다고 생각한다. 그건 이번 작품집을 읽고 새삼스레 느낀 감정이 아니다. 시인이 세상에 내 놓은 열권이 넘는 시집을 펼칠 때마다 나는 매번 똑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 일까? 비록 시인의 눈을 통하여 바라보는 산이지만 고스란히 감정이입이 되어 손에 땀이 나기도 하고 아득해 지기도 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툭툭 불거진 고산준령이, 까마득한 암벽이, 허연 빙벽이, 만져질듯 떠오른다. 그건, 책상머리에서 쓴 감정의 유희가 아니라 그렇다. 시인의 몸이 날줄이 되고 발이 씨줄이 되어 엮은, 온 몸으로 쓴 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를 읽어 가는 내내 시나브로 손에 잡힐 듯 지리산이, 설악산이, 산 사내들의 모여 앉은 모닥불이 떠오른다. 그 불씨 날리던 바람은 풍경이 되고 나는 그 풍경 속으로 침잠한다. 그렇더라도 시는 태생적으로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작법이다. 그러므로 앞서 설명하려 애쓴 시인의 시가 힘이 세다는 말은 무언가 부족하다. 힘은 무엇인가. 우직함이고 직선이다. 타협하지 않겠다는 외곬수고 군더더기 뺀 근원적 아름다움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산맥처럼 그 속살을 헤집어 본 사람만이 건져 낼 수 있는 서정이고 느낌이다. 그러므로 그건 오롯하게 산만 바라보았던 전문산악인 권경업 만의 힘이다.

여보게
넋 놓고 있으면 어쩌나
저기 저기, 용아장성 다 태우고
공룡릉으로 귀청으로 불 번지는데
어린 날의 사랑 같은 불 번지는데
못 다한 사랑 아쉬움일까
불덩어리 둥둥
가야동 계곡 떠내려가도
손끝 아린 개울물 가슴은 시려
어디 퍼질러 앉아
땅이라도 치며 엉엉 울어야 하지 않을까
                            - 가야동 만추 -

  우뚝하지만 산은 늘 외롭다. 그 산을 오르는 산쟁이 역시 외롭다. 원래 산악인은 그 외로움 때문에 산을 찾는지도 모른다. 산정에 부는 바람은 흔적이 없다. 그 맞바람 속에서 시인은 걸어올라 온 길을 반추하고 발자국 마다 고인 시상(詩想)을 형상화 한다. 그래서 절절하다. 산에서의 사계는 도시에서의 계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걸 우리는 자연으로 부른다. 산 바라기의 내밀한 느낌을 시로 승화 시키며 권경업은 시적 화해를 시도한다.

배낭 가득
삶의 고뇌를 등에 진 사람들
                                   - 산악인 -

  시적 화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이다.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옹졸함과, 이기심과, 삶의 고뇌와 허영의 약점들을 넘어 선,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산 사이의 해원이다. 말없이 포용해주는 산을 통하여 시인은 끈임 없이 묵상하고 사람과 자연사이 상생의 길을 모색한다. 그래서 시인이 그려내는 산은 더 절절해 진다. 조미료를 안 친 담백한 음식이 주는 감동이다. 시인의 몸집처럼 군더더기 없는 시어(詩語)는, 독자들에게 눈 앞 형상의 산이 아니라, 내밀한 산의 속살을 은근하게 보여 준다. 체험적 요소가 생동하는 그의 시는 분명히 책상 앞에서 쓴 시가 아니다.

나는
안개비 속에서도
슬프지 않는 한 그루 산뽕나무가 되리라

- 중략 -

나는 한 그루의 산뽕나무가 되리라
강릉 앞바다로 새아침이 밝을 때
깃발은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보다 빨리 펄럭이며
백두(白頭)로 지리(智異)로
달려가는 기수가 있다면 그대가 누구이든
숱한 어둠을 인내하며 흘리던
내 타버린 검은 눈물의 오디로 목을 축여라
그리하면
알몸으로 서 있을
대관령 길목의 한 그루 산뽕나무
기뻐하리니
                                     -산뽕나무 -

  산뽕나무가 되고 싶다니. 대관령을 넘나드는 막막한 안개비 속에 서서 먼 빛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나무가 되고 싶다니. 시인에게 있어 이제 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 자신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기어이 정상에 오르려는 전문등반가였으나 이젠 아니다. 산 고스락 넘어 존재하는 이상향을 시인은 발견했다. 이젠 두 발로 딛고 서는 정상이 시인이 도달하고자 했던 피안이 아니다. 구불거리며 흐르는 백두대간 능선 어디쯤에 동그마니 앉아, 나지막이 “산아-” 부르려는 여린 사람.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눕히나 결코 꺾기지 않는 여린 풀잎을 닮으려는 시인.

누가 이리도 다정한
소식 보내옵니까

받아 쥐고 돌아서면
금방 눈물이 되는,
               - 눈(雪) - 전문

  시인의 가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산은, 한 줄기 바람이 되더니, 별이 되고 풀잎이 되다가 향기가 되더니, 이젠 눈(雪)된다. 산은 그렇게 시인의 가슴 속에, 금/방/ 눈/물/이/ 되/는/ 눈/처럼 녹아든다. 녹색 파도로 출렁이는 산의 흐름을 보며,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시인. 말없는 산과 나누고 싶은 말들이 고였다가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는 것일까. 평생을 천형처럼 등에 진 배낭을 내려놓지 못한, 아니 내려놓을 수없는 시인은 아프다. 아프다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온다고 반기거나 간다고 섭섭해 하지 않는, 산에 대한 짝사랑으로 시인은 아프다. 그런 사랑을 하다, 꽃처럼 먼저 산에서 산화한 악우(岳友)들과의 인연이 아픈 것이다.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주는 산을 떠나지 못하는 것도 아프다. 그런 고행의 과정에서 앙금처럼 고인 산사랑 법을 시인은 체득한다. 그리고 한없이 쓸쓸해진다.

갈매숲 사라진 가을 산자락
개울물은 시월이라 울며 가는데
벌써 머언 옛날 되어버린 그해 설악엔
개옻나무 불붙던 노적봉에서
산벗을 이별하던 설움 있었다

세월은 계절 따라 사라져가도
토왕폭 비룡폭 흐르던 물은
붉게 붉게 비치던 그날 그리며

집어등 불을 밝힌 속초 앞바다
밤새워 흐느끼며 흘러갔었다
              - 토왕골에서 -

  누구든 설악산 대청봉에 서면 안다. 고스락에서 일망무제 바라다 보이는 동해가 피안의 세계라면, 제 몸 스스로 태워 온 산을 핏빛으로 물 드린 단풍 바다 설악은 볼 부비는 차안의 현실이 된다. 산속에서 시인은 시간이 지나며 자꾸 허허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을은 쓸쓸하다는 관념에 허우적거릴 나이도 아닌데 시인이 외로워지는 이유는. 그럴 것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시인은 산을 관조하며 산의 농담(濃淡)을 본 것이다. 사계절 산의 색갈이 모두 다른 것처럼 삶의 편린들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본 것이다. 그것은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 없는 깊은 산을 본 때문이다.    

산에 길 있네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어디인지도 모를

허상(虛像)의 내가
허상뿐인 나를 찾아 헤매이던 길

잘게 분해된 시간
빛바랜 햇살로 증발하는 오후의
느릅나무 숲, 으름 덩굴 사이로 열려 있네

                                  - 서진암(瑞眞庵) 가는 길. 부분-
  봄 초목의 여림이, 점차 녹음으로 변하는 과정의 경이를 보면서 생명의 탄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한철 흐드러지게 우거졌던 녹음이 윤회의 순명 속, 단풍으로 한 철 짧은 생을 마치는 것이기에 시인은 생각이 갈아 앉은 것인가. 으름 덩굴도 ‘빛바랜’ 햇살 속에 이제 사라질 계절이다. 시인의 말대로 돌아 갈 때를 알고 가는 것이다. 오고 가는 계절의 윤회와, 오면 가는 잎새의 순환.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시인이 인식하는 나무나 이름 모를 풀꽃처럼 저절로 잎새들을 피우고 지는 것. 누가 돌보아 주지 않아도 홀로 피고 지는 단풍 꽃에서 시인은 생명의 윤회와 영속성을 본다.


한 줄기, 아! 한 줄기백두대간(白頭大幹) 새 날 새 아침수천 수만의 무리진아름다운 나비의 자유완전한 유영(遊泳)을 꿈꾸는,우리는 밤마다번데기가 되는
                - 침낭(寢囊) -

  신념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니다. 노루처럼 겅중 거리며 뛰 놀던 산에서 밤마다 침낭 속 번데기가 되었던 시인은 산에서 스스로 행복해졌다. 그건 윤회를 거듭하는 자연의 이법(理法)을 안다는 것을 초월하여 체득 하는 일이다. 산이 좋은 이유를 찾아내라면 백가지도 넘겠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덕목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다. 산은 그렇게 묵상을 강요한다. 서걱거리는 마른 가지의 불협화음과 사그라지는 주변 단풍에 도드라지게 청정해 보이는 소나무들을 보며 빛과 그림자를 본다.   그리하여 시인이 노래한 가을은 가고 산도 숨을 고르는 겨울이 온다. 흑백의 구도로 바뀐 눈 쌓인 산은 또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그 춥고 황량할 겨울 산을 시인은 따듯한 눈으로 관조한다. 반전이다.

산이 춥다고, 마냥
함박눈 내리덮으면
산토끼는 밤새워, 한 땀 한 땀
목화꽃무늬, 박음질로
누비이불 만들고 갑니다

                      - 눈 덮인 취밭목의 아침 -

  산을 보면서 안다. 권경업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평생 안 죽을 것 같이 믿고 사는 우리 오만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안다. 곰곰 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모르는 것을 안다. 산속에 들면, 사람 사는 마을은 한 없이 낮아서 꼿꼿이 서 있는 우리는 산이 된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여! 부디 이 시집 한 권 챙겨 가시길. 그리하여 시인이 노래 한 산과 하나 되어 더 높아지고, 깊어지기를!

                             - 끝 - 30매. 2. 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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